계엄군 출신 이경남 목사의 현장 회고
  • 광주·高濟奎 기자 ()
  • 승인 2000.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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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현장 찾은 공수부대 출신 이경남 목사 동행 취재기 대학생들과 하룻밤 묵었던 교회, 그 자리 그대로
지난 20년 동안 그에게는 ‘호남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고속버스로 4∼5시간이면 갈 수 있는 광주. 하지만 이경남 목사(45)가 광주까지 가는 데는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5월의 회고 - 어느 특전병사의 기록>이라는 논픽션으로 제9회 전태일 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이목사는 이 글에서 ‘5월이 되면 광주를 찾아 그 끔찍했던 현장들을 돌아보고 싶다’라고 썼다.

그의 글은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리게 했다. 이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5·18 20주년을 앞둔 광주를 함께 방문할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목사는 “이제 때가 됐다. 찾아가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10일, 취재팀은 이목사와 동행해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가는 길은 내내 흐리고 비가 내렸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이경남씨는 일찍이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다. 1975년 목원대 신학과에 입학한 그는 군사 독재의 폭압에 염증을 느끼며 해방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씨는 교련 수업을 거부하다 1979년 5월 군에 입대했다. 곰을 피하려다 사자를 만난다는 성경 말씀처럼 이씨는 운이 없었다. 공수부대로 차출된 것이었다.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11공수여단 63대대에 배치된 이경남 일병(5·18 당시 계급)은 부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술·담배를 하지 않는 데다 혼자 책읽기를 좋아해 부대안에서 ‘고문관’으로 통했다.

명령보다 양심에 따라 행동

강도 높은 시위 진압 훈련(충정훈련)을 받은 이일병 소속 부대는 1980년 5월18일 오후 5시 청량리 역에서 군용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휘관들이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이목사는 5월19일 새벽 기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광주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그 해 5월21일, 시위대에 밀려 광주 외곽으로 퇴각할 때까지 11공수는 조선대에 주둔했다. 이목사는 20년 만에 다시 찾은 조선대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천막을 쳤던 장소와 당시 체포된 시민들을 구타하고 짓밟던 곳을 가리켰다. 이목사는 “공수부대원들은 부상자를 돌볼 여유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라며 참혹했던 광경을 떠올렸다.

11공수가 본격적인 시위 진압에 나선 것은 19일 오전 10시부터.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잔인했던 이유를 이목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정신교육을 받은 부대원들은 시위 자체를 불온시했고, 계속된 충정훈련으로 악에 받친 상황이어서 무자비해진 것 같다.”이일병은 곧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대. 군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신앙과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가. 극심한 갈등이었다. 이일병은 결국 후자를 택했다. 광주에 도착한 날부터 잔혹한 진압 작전을 목격한 그는, 평생 잊지 못할 5월20일을 맞이했다.

그 날 오전, 이일병은 시위대가 출현했다는 광주문화방송 일대로 급파되었다. 시위 진압에 나선 부대원들은 지나가던 청년을 체포했다. 이일병은 양심의 명령에 따르기로 한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 청년은 겁에 질린 채 “군에 입대하려고 신체검사를 받으러 왔어요. 왜 곧 군인이 될 사람까지 붙잡는 것인가요”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일병은 그를 근처 여학교의 화장실로 데려가 “공수부대가 물러갈 때까지 절대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교정을 빠져나왔다.

이목사와 함께 그 여학교를 찾아갔다. 이 목사는 교문 주변에 울창한 나무가 있었다고 말할 뿐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광주문화방송 맞은편에 있던 학교는 전남여고였다. 전남여고 옛 교문은 주택가를 끼고 돌아서 있었다. 옛 교문으로 들어서자 큰 나무가 양편으로 보였고 왼편에 화장실이 있었다. 이목사는 청년을 피신시켰던 화장실을 가리켰다. 전남여고 관계자는 “지금 저 화장실은 몇 년 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라고 말했다.5월20일 밤, 이일병은 또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부대를 이탈했다. 시내에서 조선대로 이동하던 중 조선대 근처에서 시위대와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머리를 맞고 쓰러진 시민 한 사람을 발견한 이일병은 그를 들쳐업고 주택가로 뛰었다.

이일병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렸다. 대문 옆에는 ‘광주새교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군화를 벗을 틈도 없었다. 이일병은 서재에 부상자를 내려 놓았다. 그 할아버지가 이 교회 정인보 목사(당시 65세)였다. 목사에게 부상자를 부탁하고 바로 조선대로 복귀하려 했지만 밖에는 이미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이일병은 그날 밤 귀대하지 못했다. 광주새교회에서 대학생 4∼5명과 함께 지냈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비판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했다. 이일병은 정목사에게 “탈영하고 싶다. 몸이 힘든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마음의 갈등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라며 암담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정목사는 “훗날을 위해 참아야지. 새벽에 부대로 복귀하게. 살아 남아야 하네”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음날 새벽, 이일병은 정목사가 가르쳐준 인적이 드문 철길을 따라 조선대로 복귀했다.이목사는 전남대병원 맞은편에 있던 광주새교회를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이목사는 “20년이 지났는데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게 큰 욕심이다. 독립 교회여서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면 그 교회는 문을 닫았을 것이다”라며 아쉬워했다. 전에 있던 장소라도 확인하고 싶어 근처에서 오래 살았던 주민에게 교회가 있던 자리를 물었다.

“광주새교회라? 시방도 있는디. 쩌그 왼쫙으로 보이는 낡은 건물이 교회여. 나이 든 목사님이 한 번씩 왔다가는디 아마 사람은 안 살 거여. 할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셨거든.” 이목사는 귀를 의심했다. 20년 전 그 교회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고, 돌아가신 줄 알았던 정인보 목사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목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처럼 정목사는 그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 학1동 동사무소와 동구청의 도움으로 정목사의 딸인 성희씨 연락처를 확보해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정성희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녀에게 이경남 목사의 사연을 소개하고 아버님을 꼭 만나 뵙고 싶다는 이목사의 바람도 전했다. 성희씨는 “아버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지금 찾아오더라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라며 아버지께 이목사의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말했다.

1980년 5월21일 새벽, 부대에 복귀한 이일병은 중대장으로부터 전체 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기합을 받았다. 비상계험 상황에서 부대 이탈은 즉결 처형감이었다. 이목사는 당시 중대장이 기합으로 그치고 더 문제 삼지 않은 것을 고마워했다.

그 날, 11공수는 아침부터 도청으로 이동했다. 석가탄신일이었던 21일,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낸 도청앞 집단 발포 사건이 발생했다. 이일병은 바로 그날, 그곳에 있었다. 오전 9시30분쯤, 시위대 장갑차의 돌진으로 위협을 느낀 부대원들이 인도로 뛰어들어 시민들을 짓밟았다.

이일병은 부상을 당해 피범벅이 된 시민 한 사람을 부축해 피신시켰다. 이를 지켜보던 같은 부대 하사관이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협박했다. “너 이 새끼, 아군이냐, 적군이냐? 목사 될 놈이라 이번에는 봐주지만 한 번만 더 그러면 너는 내가 죽여버린다.” 이일병이 소속한 부대는 그 날 오후 4시 도청 앞에서 조선대로 이동해 바로 주남마을로 퇴각했다. 부상으로 사선 넘나들어

5월24일, 11공수는 주남마을을 떠나 광주비행장으로 향했다. 선두 차량에 탑승했던 이일병은 총소리에 놀랐다. 처음에는 장난 같았다. 부대원들이 한두 발 발포하더니 나중에는 부대원 대부분이 사격에 가담했다. 그야말로 콩볶는 듯한 소리가 요란했다. 그 날 장난처럼 이루어진 총격으로 전재수군(당시 11세)과 방광범군(당시 13세)이 사망했다. 이목사는 당시 부대원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사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면 인간의 양심은 차단된다. 저 사람 빨갱이다, 적이다라고 규정하면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게 된다.”

양민 학살에 대한 대가였을까. 광주공항으로 이동하던 오후 2시쯤, 11공수는 송암동 효천역 부근에서 전교사 보병학교 병사들과 오인 사격을 벌이는 바람에 9명이 숨졌다. 이일병도 그때 부상해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머리 뒤쪽으로 총탄이 스치고 왼팔·오른쪽 겨드랑이·왼쪽 허벅지 등에 파편이 박혀 의식을 잃었다.

이목사가 죽음의 순간을 경험했던 그곳은 당시 2차선 굽은 도로였지만 현재는 6차선 도로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현장을 목격했던 엄금지씨(69)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엄씨의 남편 김영묵씨도 이 사건으로 한 팔을 잃고 정신적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목사는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눈시울을 글썽거렸다.

이목사는 망월동을 참배하는 길에 처음으로 5·18 피해자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5·18민중항쟁 청년동지회’ 사무국장인 이세영씨(40). 옛 망월동 묘역 앞에서 ‘오월화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씨는 “광주항쟁 이후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원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의외로 담담하다”라고 말했다. 1980년 5월21일, 한 사람은 공수부대 진압군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시위대 일원으로 마주보았을 두 사람. 그 해 5월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세영씨는 그 날 집단 발포가 시작되자마자 왼쪽 하복부에 관통상을 입어 평생 목발을 짚어야 한다. 소설가를 지망했던 이경남 목사는 광주를 떠난 뒤 5년 동안이나 방황했다. 1985년에야 복학해 신학대를 졸업했다. 이 목사는 강원도에 있는 한 개척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이세영씨는 “우리는 당시 공수부대원을 원망하지 않는다. 공수부대원들도 5·18의 피해자들이다”라고 말하며 이목사를 위로했다. 이목사는 진상 규명을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서겠다면서, “당시 도청앞 발포는 저격수에 의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집단 발포였다”라고 말했다.(36쪽 관련 기사 참조) 이씨는 “당시 군인들의 증언이 중요하다. 이목사가 계기가 되어 새로운 증언이 나왔으면 한다. 20년이 지났지만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광주를 떠나기 직전 정인보 목사의 딸 성희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님께 이목사님 이야기를 했더니 기억하고 계시더라. 찾아주어서 고맙다며 나중에 꼭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이목사는 광주를 다시 찾아오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광주를 떠나기 전날까지 잔뜩 지푸렸던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5월의 햇살에 비친 ‘천년의 빛 5·18, 평화·인권·통일의 세상으로’라는 20주년 기념 플래카드가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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