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중의 논술' 프랑스 바칼로레아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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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입자격시험, 철학 논술 ‘세계적 명성’
채점은 단 한번만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단 낙제 기준인 10점 미만 답안에 대해서는 다른 교사가 다시 채점해 실수를 방지한다. 낙제 여부를 고려할 때는 고등학교 과정의 성적도 참조한다.

프랑스에서도 채점 객관성 보장은 중요한 문제다. 두 교육청이 서로 답안지를 교환해 채점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전라도 학생들의 답안지를 경상도 교사들이 채점하는 식이다. 아주 가끔씩 시험 부정과 관련해 특정 지역의 바칼로레아가 전면 무효가 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1808년 3월17일 나폴레옹에 의해 실시된 바칼로레아 시험은 20세기 초만 해도 합격률이 11%에 불과한 엘리트 선발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후 꾸준히 합격률이 높아져 현재는 80%에 이른다. 바칼로레아는 꼭 대학 입학이 목적이 아니다. 진학과 무관하게 바칼로레아 합격증은 사회에서 고교 졸업장과 비슷한 구실을 한다. 합격증 소유 여부가 10년 뒤 임금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통계가 있다. 단, 그랑제콜과 같은 소수 엘리트 대학의 입학 시험은 바칼로레아와는 상관이 없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바칼로레아를 둘러싼 몇 가지 논란이 있다. 하나는 계층적 효과다. 노동자 자녀의 합격률이 50%인 반면, 전문직이나 교수 과학자 자녀의 합격률은 90%대를 넘는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노동자 자녀의 합격률은 점점 높아가는 추세이다(1984년의 경우는 20%에 불과했다). 따라서 한국의 사교육 현실과 비교해 보면, 프랑스인들의 걱정은 엄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철학 문화 수준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교양과 지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바칼로레아 같은 시험이 가능할까? 아직 한국 교육 시장에서 바칼로레아 문제는 인기가 없다. ㅊ논술학원의 한 강사는 “우리 논술은 장문의 제시문을 놓고 대답하는 방식인데, 바칼로레아 문제는 한 문장뿐이어서 맞지가 않다. 대신 구술 면접 주제로 소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내 대학의 한 교수는 “우리 논술은 고등학교 교과 과정을 무시한 채 교수들이 지적 오만함을 과시하는 장이 되어버렸다. ‘이런 것 몰랐지?’라고 묻는 식이다. 문제가 많다. 이러면 학생들이 공교육을 불신한다”라고 말했다. 바칼로레아 문제의 경우 주제 자체는 심오하지만 제시문은 극히 평이한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고등학교 철학 시간에 한 번쯤 다루어봄 직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 문제의 절반 정도는 한국과 비슷하게 제시문에 대한 논평형이다. 2003년 2월 <세계의 교양을 찾아서>라는 바칼로레아 문답집이 발간되어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바칼로레아 문제를 대입 논술 공부에 참고하려는 학생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바칼로레아 시험이 끝나면 여러 모범 답안이 시중에 돌아다닌다. 1999년 리방 교육청이 출제한 ‘철학은 세상을 바꿀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라는 문제집이 소개한 모범 답안의 결론은 이렇다. ‘철학이 세상을 직접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1999년 6월 프랑스 리방 교육청이 출제한 대학입학자격시험 자연계 논술 문제다. 학생들은 마치 불교의 화두(話頭)처럼 난해한 이 질문을 놓고 4시간 동안 답안 작성에 매달렸다. 대체로 수험생들은 마르크스와 헤겔, 데카르트를 들먹이며 답안지를 메웠다.

흔히 바칼로레아(프랑스에서는 BAC라고 줄여 표시한다)라고 불리는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바칼로레아에는 철학 과목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독일 아비투어(Abitur)나 영국 입시에는 철학 논술 시험이 없다.

프랑스에서 바칼로레아는 일종의 지적 국민 스포츠다. 파리8대학 연구원이던 최영주씨(불문학 박사)는 “바칼로레아 시험일은 지식인들에게 국경일처럼 여겨졌다. 제출된 문제가 뭔지 물어보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시험일 저녁에는 방송에서 토론회가 벌어진다.

바칼로레아 문제 목록을 보노라면(아래 상자 기사 참조) 그 심오함에 혀를 내두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학생들의 답안이다. 프랑스 서점가에 나도는 바칼로레아 문제집에는 기출 문제에 대해 실제 고등학생들의 답안과 이 답안에 대한 교사의 평가가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열정은 우리의 의무 이행에 반하는가?’라는 문제에, 한 학생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 프랑스까지 문학과 역사에 등장한 10여 가지 사례를 들먹였다.

일선 고교 교사들이 출제·채점

바칼로레아 시험 운영에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장한업 교수(이화여대·불어불문학과)는 “바칼로레아 제도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은 출제와 채점을 교사들이 한다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바칼로레아는 우리의 수능시험과 달리 24개 지방 교육청이 각자 출제·시행·채점을 맡고 있다. 지방 교육위원회가 과목당 교사 10여명을 선발하면 이들은 여러 차례 회의를 가진다. 소집된 교사들은 1인당 하나씩 문제를 제출한다. 최종적으로 한 문제를 결정하는 권한은 장학 감독관에게 있다.

프랑스 파리 앙리 고등학교의 한 교사는 전화 인터뷰 도중 바칼로레아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전국교원노조(SENS)에 문의하면 잘 알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바칼로레아는 현장 교사들의 몫이라는 뜻이다. 올해 6월 교원노조 파업으로 바칼로레아 시행 자체가 무산될 뻔도 했다. 장한업 교수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교육 과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학 교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교사들이 바칼로레아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바칼로레아는 6월에 치르는데, 응시자는 60만 명이 넘는다. 어떤 계열이건 상관없이 국어(프랑스어)·외국어(영어가 아니라도 상관없음)·역사 및 지리·수학·철학이 공통 필수 과목이다. 모두 치르는 데 며칠이 소요되며, 첫날은 항상 철학 시험이다.

철학 시험 답안지는 12만명에 이르는 일선 고교 교사들이 채점한다. 사실상 거의 모든 교사가 채점에 동원된다. 20점 만점인데, 16점 이상이면 트레 비엥(매우 우수), 14∼16점은 비엥(우수), 12~14점은 아세 비엥(제법 잘함), 10~12점은 파사블(합격)이라는 평점을 받게 된다. 10점 미만은 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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