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콤플렉스, 미국 콤플렉스
  • 오한숙희(방송인) ()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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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 관계의 현실적 열쇠는, 무조건 엎어지는 것과 비분강개의 양자 택일이 아닌 중간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줄 것은 주되 받을 것은 확실히 챙기는 당당함과 야무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옥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애들끼리 자기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옥희가 “우리 엄마는 복숭아를 무척 좋아해서 ‘이거 참 맛있다’ 하면 엄마가 ‘이리 줘 봐, 내꺼랑 바꾸자’고 할 정도다”라고 했다. 우리는 나쁜 엄마를 만난 옥희를 동정했다. 세월이 훌쩍 지나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래도 옥희네 엄마는 인생에서 복숭아 하나는 건졌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희생과 헌신을 어머니의 모습으로 주입 받아온 우리는 아무리 신세대라 해도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충족시키려 들 때조차 모성애 결핍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이런 자기 검열 습관 때문에 모성 콤플렉스나 모성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이 자체를 불온하게 여길 만큼 우리 사회가 찬양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희생 일변도이다.

그러나 정작 옥희네를 보면 어머니의 적당한 자기 찾기는 오히려 부모 자식 관계를 살리는 효과를 낳는다. 복숭아를 매개로 일방적인 헌신과 수혜가 아닌 호혜의 관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 문제 상담가들은 ‘고임(사랑) 바쳐 키운 자식 중에 효자 드물고, 남편에게 헌신한 여자는 헌신짝 취급 받기가 쉽다’는 말로 관계의 일방성에 숨어 있는 함정을 농담처럼 알려준다. 일방적인 희생 후에 따르는 실망과 분노로 관계가 악화하는 부작용은 인생을 웬만큼 산 사람에게도 상식이다.
최근 미국이 용산기지 이전 비용 20조원 전액을 우리 나라가 부담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전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이 뉴스를 함께 들은 30대 후반 기사는 전형적인 충청도 사투리로 미국을 맹비난했다. 미국이 우리 나라를 이렇게 깔보는데도 미국 하면 무조건 쩔쩔매야 하는 줄 알고 그래서 더욱 무시를 당하게 만드는 ‘나이 잡순’ 분들에 대한 불만도 대단했다. 한·미 관계는 국민 통합 측면에서도 중요한 사안이 된 것이다.

사실, 미국이 우리에게 하는 것을 보면 해도 너무 한다. 한·미 행정협정만 봐도 객관적으로 아주 심한 불평등 조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랫동안 공짜로 사용해온 용산기지에 대해 국내 여론이 들끓자 이전하겠다고 입막음해 놓고는 구체화 단계에서는 전부가 아니라 절반만 비우겠다고 나오고 있다. 문화재인 덕수궁 앞에 대사관 직원 숙소로 아파트를 짓겠다고 우기는가 하면, 미군기지 주변의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을 항의하자 미군 책임자는 ‘돈이 없어서 복구를 못해준다’고 태연히 말한다. 이라크 추가 파병도 그렇다. 제도적으로 동맹 관계가 더 강한 유럽 국가들은 놔두고 우리에게만 목 죄듯 하고 있다.

국제 관계의 상식으로 일방적인 시혜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게 우리는 커다란 소비 시장의 하나이며 미군 주둔 역시 중국 견제라는 자국의 이해를 추구하는 아시아 전략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한반도만을 위한 희생 정신에 기초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나 태도를 무조건 배은 망덕하거나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불온한 것이 아닌가 자기 검열을 해보는 것은 모성 콤플렉스만큼이나 강한 미국 콤플렉스라 아니 할 수 없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가적 자존심을 만회하자는 주장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미국 콤플렉스이다. 대미 관계의 현실적 열쇠는, 무조건 엎어지는 것과 비분강개의 양자 택일이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어차피 얽혀 살 수밖에 없는 국제 관계 속에서 줄 것은 주되 받을 것은 확실히 챙기는 당당함과 야무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민도는 결코 낮지 않다. 미국에게 신세진 바를 잊지 않는다 해도 이미 충분히 갚은 것도 있고 앞으로 갚을 방법 또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엄연하다. 희생과 헌신으로 일관해온 부모도 그 자식의 인생을 저당 잡을 명분이 없는 마당에 이해 관계에 따른 국가 간의 관계야 말해 무엇하랴. 대미 관계, 대차대조표를 뽑아 보며 실속 있게 풀어가야 마땅하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는 주권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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