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쇄신의 상징'이 된 <올드보이>
  • 이숙명 (월간 <프리미어> 기자) ()
  • 승인 2004.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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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회 칸 영화제/주류 영화 포용하며 조용한 변신
한국 영화계로서는 기념할 만한 축제였다. 제57회 칸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 영화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올해 경쟁 부문에 진출한 두 편의 한국 영화는,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보편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더욱 뜻이 깊다.

박찬욱 감독은 수상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지에서는 오히려 배우 최민식씨가 조명을 많이 받아 남우주연상 정도는 받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는데, 더 큰 상인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한편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일찌감치 칸 영화제 진출이 예견되었고 수상이 기대되었으나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프랑스와 그 외 국가들의 반응이 판이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 중 ‘프리미어’와 ‘카이에 뒤 시네마’ ‘렉스프레스’ ‘포지티브’ ‘르 몽드’ 등은 이 영화에 별 3개를 주었고, ‘텔레라마’는 만점인 별 4개를 모두 달아주었다. 반면 ‘스크린 인터내셔널’에 실린 유럽 몇 개국과 미국측의 별점 합계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경쟁작 중 최하위인 평균 1.4점을 기록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정반대 상황에 처해 있었다. 프랑스판 프리미어와 시놉시스, 포지티브, 라 크로와, 레페라즈, 르 몽드 등이 별 한 개도 아깝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스크린 인터내셔널에 기고한 11개국 언론은 4점 만점에 평균 2.4점이라는 양호한 점수를 주었다. 이 작품은 애초에 비경쟁부문 초청이 결정되었다가 막판에 경쟁부문 엔트리에 합류했다. 월드 프리미어를 원칙으로 해왔던 칸 영화제가 DVD 마켓에도 출품된 이 영화를 경쟁부문에 불러들인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고, 이 때부터 ‘뭔가 주려는 것 아니냐’ 는 추측이 흘러나왔다. 아시아 영화와 장르 영화의 마니아로 알려진 심사위원장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티에리 프레모 아트디렉터, 양측의 지지가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사실 <올드보이>는 이미 미국의 장르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필견 목록에 올라 있던 작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올해 영화제를 소개하는 인터뷰에서 “내 주변에 <올드보이>를 본 사람들이 9명쯤 있다. 그들이 모두 이 영화를 격찬했다. 박찬욱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 훌륭한 액션 감독이다”라고 치켜세웠다. 때문에 심사위원단 9명 중 4명이나 되는 미국인이 얼마나 큰 목소리를 낼 것인가에 따라 <올드보이>의 수상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는 것이 칸 현지의 중론이었다.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쇄신을 상징하는 작품으로도 자주 언급되었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작 19편 중에는 아시아 영화가 6편이었다. 태국 영화(아피차퐁 위라세타쿨의 <열대병 Tropical Malady>)과 재패니메이션(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이 처음으로 이 부문에 진출했고, 장르 영화 두 편(왕가위의 <2046>과 <올드보이>)이 포함되었다. 유럽 영화의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며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영화의 경우 토속성에 준해서만 가치 판단을 내리던 칸 영화제가 한국·중국·일본·홍콩의 장르 영화를 선물 세트처럼 라인업에 짜넣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23년 동안 칸 영화제를 이끌었던 질 자콥 집행위원장이 직함을 반납한 2000년 이후, 새로운 집행부는 종전과는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영화제를 이끌어 왔다. 새로운 감독들을 발굴하고, 진정한 ‘인터내셔널’ 영화제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한편으로는 작가주의 일변도였던 프로그램에 코미디와 컬트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끼워넣기 시작함으로써, 영화제가 점점 메인스트림에 다가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슈렉> 시리즈를 두 번 모두 경쟁부문에 초청한 것은 이같은 변화의 기운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일이다.
긍정적인 취지 아래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모험들에도 불구하고, 올해 칸 영화제에서도 획기적인 화젯거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코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월터 셀레스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아네스 자오이의 <이미지처럼>, 그리고 <올드보이> 등이 그나마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그중 무엇도 새로운 영화적 비전을 제시하거나, 거센 논쟁을 불러 일으키거나, 주목할 만한 발견으로 기록되지 못했다.

조용하고 무난한 상영작들로 인해 침체해 있던 극장 안 분위기에 비해, 거리의 풍경은 한결 역동적이었다. 지난해 아비뇽 연극제를 무산시킨 예술분야 비정규직 노조가 올해는 칸 영화제를 타깃으로 삼았다. 시위 행렬은 행사가 열리는 칸의 크로아제트 거리에 수시로 출몰했고, 천여 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다. 프레스센터와 상영관들이 밀집한 팔레 드 페스티벌 건물에서는 전에 없이 철저한 아이디와 소지품 검사가 행해졌다.

부시 행정부를 거세게 비판·조롱하는 다큐멘터리 <화씨 9/11>을 들고 칸을 방문한 마이클 무어는 “나는 전세계 노동자와 함께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라며 시위 행렬에 가담했다. 한편으로 그는, 미국 대통령 선거 전에 이 영화를 개봉할 생각이 없다는 배급사 디즈니에 항의하며 영화제 분위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칸은 그에게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김으로써 세계적인 관심에 부응했다.

주요 수상작 황금종려상 <화씨 9/11> (마이클 무어 연출)
심사위원 대상(그랑프리) <올드보이>(박찬욱 연출)
남자연기상 유야 야기라,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
여자연기상 장만위, <클린>(올리비에 아싸야스 연출)
감독상 토니 갓리프, <엑사일>
각본상 아네스 자우이, 장 피에르 바크리 <이미지처럼>(아네스 자우이 연출)
심사위원상 <열대병>(아피차퐁 위라세타쿨 연출), 이르마 P. 홀(<레이디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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