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판 된 기름 시장, 투기꾼만 살판 났네
  • 뉴욕·최수진 통신원 ()
  • 승인 2004.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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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지펀드 돈놀음에 금융사 ‘스프레드 베팅’도 극성…유가 불안 부추겨
전세계가 고유가로 아우성을 치는 사이, 장막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석유 딜러들이다. 배럴당 50달러 선에 육박했던 국제 유가 오름세가 최근 주춤해지면서 헤지펀드(모험적 투자를 하는 펀드) 등 투기 세력들이 원유 시장에서 대거 빠져나오고 있지만 대규모 석유 딜러들은 지난 1년간 꾸준했던 고유가 행진 덕에 상당한 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월 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파산한 에너지 기업 엔론 출신인 존 아널드는 자신이 설립한 헤지펀드를 원유 선물에 투자해 지난 1년간 2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또 석유업계 베테랑 딜러인 분 피켄스 역시 헤지펀드를 통해 지난 2년간 5억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투기적인 거래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헤지펀드에 비해, 비교적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는 투자 은행들도 원유 거래 시장에 발을 들여놓아 투기 바람을 부추겼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은 보도했다. 씨티그룹 계열의 ‘AAA 캐피털’이 대표적이다. 이 펀드는 원유 선물 거래 사업에 주력한 결과, 올해 수익이 24% 증가했다. 영국계 바클레이스 캐피털과 미국계 모건 스탠리도 원유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대다수 석유 딜러 ‘대박 잔치’

이처럼 헤지펀드는 물론 투자 은행들까지 원유 선물 거래에 다투어 뛰어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생산은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은 가운데 중국 등 신흥 산업국의 석유 수요가 급증하고 이라크 정세가 계속 불안해 고유가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유가가 일단 ‘심리적인 저지선’인 배럴당 50 달러 선을 넘지 않은 상태에서 떨어지고는 있지만 복병은 여전히 많다. 현재의 원유 선물 거래가 고전적 의미의 선물 거래와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투기가 가열될 위험이 잠재해 있다. 유가가 언제 또다시 고공 비행을 시작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시장 분석가들의 의견이다.

뉴욕상품거래소의 설명에 따르면, 헤징(hedging)은 시장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생산자의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해주고, 수요자에게는 낮은 비용으로 석유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위해서도 헤징은 필요하다. 문제는 투기 성향을 가진 투자자들이 이를 악용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낮은 가격에 석유를 사서 높은 가격에 되파는 수법으로 수익을 얻는다. 또 투기꾼들은 시장에 유동 자산을 투입하거나, 거래가 성사되도록 하기 위해 원래 의도를 숨기고 반대 입장에 서기도 한다. 게다가 거래가 이루어진 뒤 만기일 전에 미리 팔아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견본을 보여주고 실제 필요로 하는 상품을 사고 파는, 고전적 의미의 선물 거래는 이제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석유 딜러들이 유가 급등으로 한몫 단단히 챙기고 있는 것과 함께, 유가 등락의 향방을 놓고 투자하는 ‘스프레드 베팅’이 올 들어 빠른 추세로 늘고 있다. 이 또한 석유 딜러들의 투기성 투자와 함께, 유가 불안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미래의 일정 시점에 미리 결정된 가격으로 석유를 사는 선물 거래와 달리, 스프레드 베팅은 유가의 상승과 하락, 양쪽에 모두 투자할 수 있다.

또 스프레드 베팅을 전문으로 하는 금융회사에는 일반 개인 투자가들도 쉽게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그만큼 대중적이며 파괴력이 크다. 스프레드 베터들은 순식간에 일확천금할 수도 있지만, 단 몇분 만에 대규모 손실을 볼 수 있다. 스프레드 베팅은 그야말로 ‘도박’인 것이다. 올해처럼 유가가 큰 폭으로 유동성을 나타내는 시기에는 스프레드 베팅이 모험을 즐기는 투자자들에게 더없이 매력적이다. 상품 사라지고 거래만 남은 ‘선물 거래 시장’

뉴욕상품거래소는 이같은 도박이 사실상 합법적으로 보장된 공간이나 다름없다. 뉴욕상품거래소의 시원은 1872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뉴욕의 유가공 업주들은 제품을 좀더 효율적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버터·치즈 거래소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가장 열악한 보관 창고와 가장 비싼 가격, 그리고 운송 상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달걀이 주요 거래 품목으로 떠오르자 거래소 이름은 곧 버터·치즈·달걀 거래소로 바뀌었다. 이후 거래 품목은 채소와 건과류, 캔 음식 등으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1882년 현재의 뉴욕상품거래소로 이름이 확정되었다.

20세기 초반 운송과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뉴욕과 시카고 등 대도시에 좀더 효율적으로 상품을 매매하기 위해 주요 마켓 웨어하우스가 건설되었다. 그 전까지 중·소 도시 중심의 비즈니스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지방 소도시 거래소들이 자취를 감추는 대신 대규모 거래소가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뉴욕과 시카고의 선물 거래 시장은 원래 효율적인 상품 거래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상품거래소에서 ‘상품’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상품은 제쳐둔 채 오로지 ‘거래’만으로 수익이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유 딜러나 스프레드 베터들이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방법이다.

석유 딜러와 스프레드 베터들은 앞으로도 계속 휘파람을 불게 생겼다. 에너지 관련 정부기관이나 언론이 내놓은 우울한 전망 때문이다. 미국 CBS 경제 뉴스는 최근, 세계 원유 공급량이 수요 급증으로 인해 기대하는 만큼 증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에너지정보국(EIA)은 2005년 중반까지 유가가 배럴당 40 달러 이상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에너지정보국의 이같은 예측을 입증이라도 하듯, 지난 8월말 2주간 내림세를 보였던 서부텍사스중질유의 10월 인도분은 9월 들어 다시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 9월 초 미국의 원유 보유량이 3월 중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2억8천5백만 배럴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발표 당시까지 미국의 원유 보유량은 5주간 연속해 줄어들었다. 미국 일반 시민에게는 불길한 소식이지만, 석유 딜러들에게는 희소식이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장소를 차지하고 ‘바이 앤드 셀’을 외치는 석유 브로커들. 그들은 눈에 띄는 재킷을 입고 있지만, 일반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장 비밀스런 언어와 ‘그들만의 몸짓’으로 원유를 사고 판다. 그들의 몸짓이 활발해질수록 세계는 긴장해야 한다. 유가 불안이 커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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