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한국전쟁 때 생물 무기 썼다”
  • 프랑크푸르트/허 광 (rena@sisapress.com)
  • 승인 1999.07.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랑스 월간 신문 폭로…‘중국군 참전 후 박테리아 살포’설 제기
‘중국은 52년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생물 병기를 사용했다고 유엔에 제소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 백과사전 <브리태니카>의 ‘생물학 무기’ 항목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파리에서 발행되는 월간 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틱>은 올 7월호에서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글을 실었다. 요지는 미국이 한국전쟁을 생물 병기의 실험 무대로 삼았을 뿐 아니라 영국과 캐나다도 여기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캐나다 요크 대학에서 아시아 역사와 군사 사학을 연구하고 있는, 이 글의 공동 저자 엔디코트와 하거만 교수는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 예를 들어 미국의 생물전 자료를 보관한 미군 사료실, 중국이 외국인에게는 개방하지 않았던 중국군 문서실, 또 캐나다 중앙사료실 등에서 이같은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아냈다고 한다. 두 교수는 이 분석 결과를 정리해 올해 초 <미국과 생물 전쟁: 한반도와 냉전 초기의 비밀>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요지를 <르몽드 디플로마틱>에 다시 소개한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틱>은 20여 쪽 밖에 안되는 신문이다. 그러나 국제 문제를 집중 분석하는 이 신문은 말 그대로 ‘글로벌 시대’를 실감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어말고도 독일어· 스페인어·그리스어·이탈리아어 등 유럽의 5개 국어와 아랍어로 번역되어 70만부나 발간되기 때문이다. 또 영어·일어 판은 인터넷을 통해 구독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호를 통해 그동안 가려졌던 한국전쟁의 단면이 다시금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셈이다.

“마셜 국방장관, 박테리아 무기 개발 계획 주도”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생물 병기를 사용했다는 설을 지금껏 일관되게 부인해 왔다. 중국의 요구에 따라 52년에 구성된 국제조사단이 생물 병기 사용 가능성을 확인했을 때도 미국은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생물전의 증거로 제시된 자료들이 하나같이 조작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미국 내에는 이같은 정부 입장에 동의하는 학자층도 두터웠다. 지난해 우드로 윌슨 연구소가 펴낸 <국제 냉전사>는 미국의 생물 병기 사용설이 ‘철저하게 조작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로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캐나다의 두 교수가 소개한 생물 전쟁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에 생물 병기 사용 계획의 첫 테이프를 끊은 인물은 조지 마셜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다. 그는 50년 10월27일 박테리아 무기 개발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중국 의용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나서 2주일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후 51년 12월21일 마셜의 후임으로 부임한 로버트 로베트 국방장관은 참모들에게 박테리아 무기를 실전에 투입할 준비를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이에 따라 참모부는 52년 2월2일, ‘지금까지 실전에 사용되지 않은 강력한 공격 무기를 개발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참모부는 미국 정부가 핵무기를 사용한 전례에 따라 박테리아 전쟁도 비밀리에 준비해야 하며 무기를 실전에 투입하는 데는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박테리아를 공격 무기로 사용하는 전략이 없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러면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어떤 생물 병기를 사용했을까? 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주로 미국 공군의 하청을 받은 연구진과 군수 업체들은 콜레라·이질·티푸스 등 전염병과 농작물 오염을 확대하는 박테리아를 개발했고 여기에 캐나다와 영국도 3자 협정을 맺고 참여했다. 캐나다는 박테리아를 옮기는 곤충과 이 곤충을 살포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또 심리전용으로 살포하는 전단에 유독성 포자(胞子)를 묻혀서 일종의 ‘분사 폭탄’으로 사용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박테리아 무기는 52년 3월부터 전투 부대나 병참 지원 차원에서 사용되었는데, 핵무기와 생물 무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작전 연구가 이 무렵 끝났다.

미국이 실제로 생물 병기를 사용했는지 오랫동안 판단을 유보하던 중국은 52년 2월에야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 의용군에 속해 있던 조선족 의사들이 제시한 자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중국 과학자들이 확인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지역에서 보기 힘든 해충이 미국 공군의 항로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북동부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한 전염병은 한반도에서는 오래 전에 근절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콜레라는 12년에, 페스트는 46년에 근절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52년 3월 한달 내내 북한과의 국경 지역에서 뇌염이 유행한 것도 이같은 사례에 속한다. 중국 북동부에서 뇌염은 보기 힘든 전염병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유행한 뇌염은 해충이 전염시켰던 과거의 중국 뇌염과 달리 호흡기를 통해 전염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런 사실은 중국에서 유행한 전염병이 미국에서 집중 연구한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공군이 에어러졸을 살포해 호흡기를 통한 감염을 실험했다는 사실과도 맥이 통한다.

“한국을 생물 병기 실험장으로 활용”

또 중국에서 발견된 추위에 견디는 해충(절족 동물)도 미국의 생물 병기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런 종류의 해충을 생물 무기로 연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새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그 발언을 한 옌킨스 박사가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 정부 연구소에서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종류의 해충을 연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생물전 실시에 대해 국제적인 의혹이 일 때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발견된 전염병이 일본이 개발한 생물 병기와 관련이 있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생물 병기를 개발하고 중국 포로를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사용한 악명 높은 731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부대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49년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전범 재판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731 부대 책임자들은 전쟁 범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미국에 정보를 넘기고 미국의 생물 병기 연구에 합류했다. 미국은 요코하마·교토에 있는 일본의 생물 병기 연구 시설도 고스란히 접수했다. 이 사실이 80년에 알려지자 미국은 또 다른 방어 논리를 폈다. 생물 무기 개발 분야에서 일본으로부터 그다지 얻은 바가 없어 일본과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으며, 이 연구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53년에 남긴 편지에서 ‘태평양 전쟁이 45년 8월에 끝나지 않았다면 미국은 생물·화학 무기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의 생물 병기 개발이 한국전쟁과는 무관하게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엔디코트와 하거만 두 교수가 내린 결론은, 생물 병기 전쟁이 미국의 군사 전략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고, 한국전쟁은 그 실험 무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40년대 초부터 생화학 무기뿐만 아니라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연구를 하고 있었고, 그 방법의 하나로 미국 내에서도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국방부와 에너지부의 위탁을 받은 과학자들은 플루토늄과 같은 독성 방사능 물질을 민간인들에게 주사했다. 미국의 핵무기개발계획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핵전쟁에 대비해 방사능의 부작용을 파악한다는 목적으로 걸인·중환자·정신병 환자들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의 대학은 국방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암환자들에게 방사능 실험을 했다. 또 에너지부는 죄수들의 고환에 방사능을 쬐는 실험을 했다. 이런 생체 실험은 하버드·캘리포니아 등 유명 대학의 연구진들에 의해 70년대까지 진행되었다. 생물 병기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민간 주거지나 공항·지하철에 박테리아를 살포하는 실험도 있었다.

미국, 국내에서도 민간인 대상으로 생체 실험

이런 사실이 93년 11월 미국의 일간지를 통해 알려지고 미국 의회가 조사 작업에 나섰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각 부처에 생체 실험을 지시했거나 자금을 댄 사례를 찾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에너지부는 48~52년 방사능 가스를 주거지에 살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50년대부터 수천 명에게 마약과 환각제를 복용시킨 중앙정보국(CIA)이 73년에 관련 문서를 파기한 사실도 있다. 당시 에너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어째서 미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이런 생체 실험을 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나는 독일 나치스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나치의 생체 실험은 특정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의 생체 실험은 나치의 생체 실험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무언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질이 떨어지는 인간’을 골라 본인 모르게 실험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방사능에 아무런 위험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왜 사회적인 약자들만 골라 실험한 것일까? 또 방사능의 위험성을 몰랐다면 더더욱 실험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위험성이 알려진 70년대까지도 생체 실험이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 미국 정부는 93년, 생체 실험 사례를 마지 못해 인정할 때까지 피해 보상을 거부할 목적으로 변호사 비용으로만 5천만 달러를 쏟아붓기도 했다.

미국의 원폭 실험은 생체 실험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에너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90년까지 2백4회에 걸쳐 몰래 핵무기 실험을 했다고 공개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하고 나면 주민들의 신체 검진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때가 방사능의 ‘효과’를 측정하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인데, 에너지부 문서에는 ‘방사능 오염도가 최고도에 이른 지역의 주민들은 실험용 쥐보다 쓸모가 많았다’고 적혀 있다.

미국 내에서 생체 실험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미국 정부가 그 사실을 마지 못해 인정하자 미국 언론이 보인 반응 또한 볼 만했다. 이들은 ‘충격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정부 스스로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냉전이 실제로 끝났음을 알리는 징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진실 보도’ ‘탐사 보도’를 구호로 내건 그들은 80년대 초에 생체 실험 문제가 처음으로 여론화할 때 침묵하고 있었다. 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81년에 방사능 실험 피해를 다루는 의회 청문회에서 의장을 맡았지만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성과도 주지 못했다. 언론과 정계 모두 레이건 시대의 신냉전 조류에 역행하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생물 병기 실험설을 부정하는 측은 아직도 그것이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이들은 캐나다의 두 교수가 정해진 결론을 갖고 이 결론을 합리화할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측의 정보가 사실인지 의심해 보지도 않았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미국 국내의 생체 실험을 이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평화시’에 국내의 약자를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는 권력이 전쟁시에 국외의 인종을 실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