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산업 ‘로켓’ 올라탄 러시아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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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아시아와 잇달아 기술 협정…미국에 빼앗긴 ‘고토’ 회복 노려
러시아 우주 산업이 날개를 달았다. 지난 2월 미국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 참사는 우주 개발에서 러시아와 미국이 손을 잡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우주 개발을 꿈꾸는 유럽·아시아 각국을 러시아로 몰려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 러시아는 고객 맞이에 분주하다.냉전과 함께 시작된 우주 개발 역사는 이미 50년을 넘어섰다.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가 벌인 우주 경쟁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중 미국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참사만큼 큰 사고는 없었다. 이 참사는 세계 패권에 이어 우주 패권 장악을 눈앞에 두었던 미국의 야심을 잠재웠고, 역으로 경제 붕괴 이후 ‘죽을 쑤고 있던’ 러시아 우주산업에 청신호를 밝혀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참사가 발생하자 러시아는우주 개발 협력과 더불어 그 대가로 미국의 자금 지원을 예상했다. 하지만 사건 직후 미국의 입장은 냉랭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손 오키프 국장은 “새로운 컬럼비아호를 건조할 생각도, 러시아와 손잡을 의사도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사실 돈도 부족했다. 미국 행정부는 지난 2년 동안 우주 개발 예산을 27%나 삭감했고, 그 중 상당 액을 국방비, 특히 미사일 방어(MD) 체제 구축 예산으로 전환했다.

양국간 정치적·군사적 불신도 걸림돌이었다. 러시아 군수산업에 대한 미국 의회의 불신이나 반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측은 러시아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우주산업에 온 정력을 쏟는 이면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해 왔다. 사실 우주산업은 미사일 기술이나 군사 전략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미·소가 한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치하던 냉전 시절, 러시아는 우주정거장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미국이 강력히 반발하자 철회한 바 있다.

한편 러시아의 우주 분야 평론가 이고리 리소프는 <우주학 소식>지에서 ‘미국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우주 비행사 왕래와 필수품 공급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소유즈호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낙관론을 폈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지난 4월 유리 말렌첸코(러시아)와 에드워드 루(미국) 비행사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에서 우주왕복선 소유즈호를 함께 타고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떠났다. 또 지난 6월 초에는 미국의 AMC9 텔레비전 위성이 러시아 로켓 운반체에 실려 지구 궤도로 발사되기도 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 5월 말 상트페테르부르크 건립 300주년 기념식 때 발생했다. 행사에 주빈으로 참석했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우주 개발에서 상호 협력하기로 약속한 일이다.

컬럼비아호 참사의 여파는 유럽 쪽에도 미쳤다. 이를 계기로 유럽이 우주 개발에서 최초로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된 것이다. 지난 6월2일 유럽우주국(ESA)은 개설 48돌을 맞은 우주기지 바이코누르에서 화성 탐사선을 발사했다. ‘마스 익스프레스’라고 명명된 이 탐사선은 6개월 동안 우주 공간을 4억km나 비행한 뒤 화성 궤도에 진입해 올 크리스마스 날 비글 2호를 화성에 착륙시킬 예정이다. 비글 2호는 화성의 생명체 존재 여부를 밝히고, 토양과 암석의 성분을 분석해 지구로 전송한다.

유럽우주국 과학부 국장인 데이비드 사우스우드 박사는 “2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러시아와의 협력으로 유럽은 우주 개발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또 유럽 언론들은, 유럽이 러시아와 협력함으로써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미국식 우주 개발에서 벗어나 적은 경비로 우주 탐사 시대를 열었다고 논평했다.

아시아 국가들도 러시아로 몰려들고 있다. 지난 5월 말 상하이협력기구 회의에 참석하러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은 러시아 우주 개발의 대명사 격인 흐루니체프 우주센터를 방문해, 양국간 우주 개발 협력에 관한 협약에 서명했다. 또 최근 노조미(희망)호를 화성으로 쏘아 보낸 일본도 러시아와 협력을 타진 중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5월 러시아와 우주기술협정을 잠정 체결한 한국은, 오는 9월 한국 기술진이 제작한 과학기술 위성 1호(STS1)를 러시아 플례세츠크 우주 기지에서 코스모스 로켓에 실어 쏘아올릴 예정이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 들이 앞다투어 러시아로 향하는 까닭은 우선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러시아 로켓 운반체 사용료는 미국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싸다. 둘째, 발사 성공률에서 러시아 로켓의 성능은 믿을 만한 편이다. 지금까지 러시아에서는 로켓이 수천 발이나 발사되었지만, 이렇다할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셋째, 미국과 비교할 때 우주 기지 사용 조건이 까다롭지 않다. 미국은 로켓·우주 기술의 세계적 확산을 우려해 계약 조건을 까다롭게 하고 엄격히 통제한다. 반면 러시아측의 통제는 좀 느슨한 편이다. 넷째, 발사장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바이코누르의 입지 조건도 손꼽을 수 있다.

9·11 테러 사건 이후 러시아의 우주 정책은 새로운 차원을 맞고 있다.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임차한 바이코누르 기지의 사용 조건이 점차 까다로워지는 데다 테러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앞으로 10년 동안 2백60억 루블(한화 1조4백억원)을 투자해 자국 내 우주 기지를 현대화할 계획을 세웠다. 또 북해에 인접한,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유명한 아르한겔스크 시 인근의 플례세츠크 기지를 현대화하겠다고 결정했다.
2001년 말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인도양 위에 떠 있는 ‘탄생’이라는 이름의 작은 섬을 임차해 오스트레일리아 국적 APSC 회사와 합작으로 우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총 5천2백만 달러를 투입해 2004~2005년께 완공할 예정이다. 기지 완공 후 러시아는 텔레비전 송·수신 위성을 띄워 동남아 국가들을 상대로 ‘흥행’에 나설 계획이다

냉전 이후 우주산업은 관광 분야에서 불황의 탈출구를 찾았다. 러시아는 우주 관광 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2년 전 최초의 우주 관광객 데니스 티토(미국)에 이어 남아공 마크 샤틀보스를 우주선에 태워 관광시킨 대가로 수천만 달러를 챙긴 러시아는 지구 궤도에 이른바 ‘미니 위성’을 띄울 프로젝트를 짰다. 미니 위성 한 개를 띄우는 비용은 1억 달러. 1억 달러짜리 초호화 우주 관광 호텔을 운영할 계획인 것이다. 호텔은 관광객 3명이 20일간 안락하게 쉴 수 있는 편의 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우주 경제’가 좋아지면서 열악한 국제 우주정거장 주거 환경도 개선되고 있다. 우주 정거장에 근무하는 우주인들은 거친 우주의 소음 대신에 개구리 울음소리 등 지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최근 발사된 우주 화물선 ‘프로그래스 M1-10’은 식량·장비·식수·연료 등 2.5t에 이르는 화물과 함께, 파도·새·비·개구리 소리 등 ‘지구의 소리’를 담은 CD와 코미디 영화 DVD를 싣고 우주로 떠났다. 이 프로그램을 주관한 올가 코제렌코 심리학 박사는 “좁은 선실에서 근무하는 승무원들에게 지구 환경과 비슷한 상황을 연출해 그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갖고 근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설명했다.

지구 패권을 미국에게 내주었지만 ‘꿈의 우주 시대’만큼은 러시아가 먼저 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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