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눈 나쁜 사람, 비행기 타지 마?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1.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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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 안내 표지판 '총체적 부실'…

알아보기 힘들고, 영문 표기도 미비




눈 나쁘고 한글 모르는 사람, 상상력이 빈약해 퀴즈 풀이에 약하거나 머리가 나쁜 사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이용할 수 없음!'


이런 말이 어울릴 정도로 불편하다는 뜻이다. '친절한 공항 웃음 짓는 여행객'을 광고 문구로 내건 인천공항. 두 달 전 동북아 허브 공항을 목표로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최첨단 국제공항다운 웅장한 '하드웨어'를 뽐내고 있지만 이용객들은 '친절하지 않은 소프트웨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난 5월30일 '인천공항을 인간공학적으로 분석하라'는 이면우 교수(서울대·산업공학)의 숙제를 받아든 서울대 산업공학과 학생 4명과 함께 영종도 신공항을 찾았다. 지하 2층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승강기를 이용해 출국장까지 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로 찾기였다.


미로 찾기는 지하 주차장 승강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승강기 앞에는 공항 안내 표지판이 있었지만, 지상 4개 층인 전체 시설물 가운데 2층까지만 안내하고 있었다. 3층과 4층은 직접 올라가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라는 식이었다.




안내판을 대충 훑어 본 뒤 승강기에 오른 일행은 당황했다. "아뿔사, 출국장으로 가려면 몇 층에서 내려야 하더라?" 이상수씨(96학번)가 말했다. 승강기 안에는 층별 안내판이 전혀 없었다. 승강기 밖에 있던 공항 내부 지형도를 숙지하지 않은 사람은 몇 층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2층에서 내린 일행은 출국장 표지판부터 찾아야 했다. 두리번거리며 출국장 표지판을 찾던 일행 중 한 사람이 2층 현관 문 앞에서 넘어질 뻔했다. 짐수레 출입을 막기 위해 박아놓은 쇠말뚝에 발이 걸린 것이다. "트렁크도 옮길 수 없게 이렇게 막아 놓으면 어떻게 해?" 뒤에 오던 한 이용객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쇠말뚝은 거의 모든 에스컬레이터 앞에 박혀 있었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이용하는 승강기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로 찾기의 다음 단계는 암호로 채워지다시피 한 표지판 읽기. 출국장·도착장·주차장 등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해석해내기가 난감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현재 서 있는 곳이 몇 층인지 알려주는 것이 없는 데다, 표지판 내용이 모호해 마치 사지선다형 시험 문제 같았다. ① 지금 있는 곳은 1층이니까 도착장에 가려면 앞으로 가라 ② 지금 있는 곳은 1층이니까 도착장에 가려면 위로 올라가라 ③ 도착장은 1층이니까 앞으로 가거나 ④ 위로 올라가라. 이런 식이었다. 독일에서 산다는 윤부근씨(48)는 "표지판은 잘 알아보라고 세우는 것인데, 공항 내 표지판은 해석할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라고 지적했다.


하드웨어 '웅장', 소프트웨어 '엉망'




결국 자원 봉사자를 찾아 현재 층이 몇 층이며 출국장에는 어떻게 가는지를 묻기로 했다. 한글로 '자원 봉사'라고 씌여진 겨자 색 유니폼을 입은 자원 봉사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영빈씨(96학번)가 말했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은 자원 봉사자를 어떻게 찾지? 외국인도 답답하면 한글을 배우라는 뜻인가?"


자원 봉사자의 안내를 받아 출국장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출국 수속을 밟거나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공항 관광을 나온 사람들로 출국장은 꽤 붐볐다. 우선 3층의 시설 정보를 담은 안내 표지판부터 찾았다. 시설 안내 표지판은 100여m 간격을 두고 꽤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표지판 앞에 선 일행은 또다시 장벽에 부딪혔다. 글자 크기가 너무 작아 표지판 바로 앞(약 50cm歌타?에 다가서야 내용을 읽을 수 있는 데다 전체 지형지물을 표기한 약도는 암호와 같았다. 표지판을 보던 이용객 유창지(63·인천 남동구)씨가 투덜거렸다. "나처럼 늙거나 눈 나쁜 사람은 볼 엄두도 못 내겠군. 게다가 이 약도를 해석하려면 암호 해독가 정도의 실력은 갖춰야겠어."


그나마 표지판 대부분이 이용객의 진행 방향과 평행으로 놓여 있어 진행 방향 정면에서는 표지판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몇몇 표지판은 기둥 뒤에 숨어 있기도 했다. 이정빈씨(96학번)가 말했다. "표지판과 숨바꼭질하라고 이렇게 해놓았나 봐. 이용객이 걸어가면서 표지판을 보려면 게처럼 옆으로 걷거나, 가자미 눈으로 흘겨봐야 하겠네. 엽기 게걸음 공항이야."




답답하면 한글을 배워라? : 일본어로 된 단말기 정보(왼쪽)는 오자가 많고, 자원 봉사자 유니폼은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다.


일행은 표지판 대신 공항 내 시설 정보를 터치 스크린 방식으로 알려주는 '안내 단말기'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안내 단말기에는 조작법을 설명한 안내문이 전혀 없어 터치 스크린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일본인 겐조 사카시타(34) 씨가 공항 내 시설 정보를 보겠다며 터치 스크린을 조작했다. "이 '언어 선택'에서 '택'자가 잘못되어 있다. '택시'나 '좋다'란 글자도 틀렸다. 지하철 노선도는 너무 복잡해서 읽을 수가 없다. 일본인은 대전·부산·광주 따위 지명을 읽을 수 없으므로 영어 표기를 병행해야 한다." 일본인 이용객을 위한 정보가 오류 투성이거나 무용지물이어서 망신만 당한 셈이다.




비행기 출발과 도착 시간을 알리는 스크린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정열씨(94학번)는 스크린을 제대로 보려면 선글라스라도 써야 할 판이라고 투덜거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시원하게 설계된 덕에 조명 비용은 줄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크린은 역광을 받아 몹시 눈이 부셨다. 게다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게 설치되어, 높은 곳에 위치한 스크린을 보려면 목을 45° 이상 뒤로 젖혀야 했다. 목을 꺾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서면 글자 크기가 작아서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사람 키 높이로 낮게 설치된 스크린은 그 앞에 대여섯 명만 모여도 가려졌다.


또 비행기 출발 현황을 알리는 대형 전광판은 한글과 영문이 반복해 나타나도록 설계되었는데, 총 40개의 비행기 노선이 6초 간격으로 빠르게 바뀌어 원하는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시계는 전광판 귀퉁이에 '점처럼' 박혀서 시력 1.5 이상만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라 별 시간을 알 수 있는 시계는 3층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출국장을 모두 돌아본 일행은 인천공항에 막 도착해 서울로 향할 이용객의 처지에서 도착장과 공항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도착장 역시 친절하지 않은 소프트웨어로 가득했다. 1층 도착장에는 버스 노선 안내판이 있는데, 그야말로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이다. 단 하나의 표지판에 공항 노선 버스에 관한 정보를 모두 수록해 조잡한 것은 물론이고, 글씨가 워낙 작아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눈을 씻고' 보아야 한다.


"이용객 골탕 먹이려고 설계한 것 같다"




버스 정류장 위치 안내도는 설계 당시에는 없던 것을 임시로 마련한 것인지 종이에 그려 붙여 놓았다. 그나마 여기저기 찢겨 있고 한글로만 쓰여 있었다. 공항 밖에 설치된 정류장 안내도는 꽤 신경 써서 만들었지만 여행객이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진행 방향 뒤쪽에 붙여 놓았다.


공항 밖 버스 정류장에는 노선 별 버스들이 즐비한데, 이 곳 표지판 역시 여기저기 쓰고 지운 흔적이 역력한 '누더기'이다. 게다가 노선 방향을 영어로 표시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려는 승객도 택시 정류장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 공항 주변을 헤매야 한다.


"이 공항을 설계하고 공사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용객을 골탕 먹일 수 있을까 그것만 연구한 것 같다. 멋 모르고 왔다가는 비행기 시간 놓치기에 딱 알맞다." 공항 취재에 동행한 학생들은 공항을 다 둘러본 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지난 5월21일까지 이용객을 대상으로 '고객 불편 및 건의사항'을 접수한 결과에서도 안내판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접수된 카드 1천2백29건 중 1백8건(8.79%)이 안내판이 부족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학생들은 공항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을 제시했다. 우선, 글씨 크기·자간·줄 간격이 작아 알아보기 어려운 각종 표지판은 고령자를 기준으로 삼아 글씨를 크게 해야 가시성과 판독성을 높일 수 있다. 유정열씨는 "표지판의 가시성과 판독성은 거리·조명·획의 굵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항 내 표지판은 그런 요소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컬러 표지판의 경우 글자와 배경색을 바꾸어 선명도를 높이고, 버스 노선 안내판처럼 정보의 양이 지나치게 많을 경우에는 행선지 별로 따로 표지판을 제작해 분산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은 한글과 영문의 전환 주기를 10초 정도로 늘리고, '시카고(CHICAGO)' 형식으로 한글과 영문을 동시에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 위치를 알려주는 층 표시가 빠져 혼돈을 일으키는 출발/도착장 표지판은 현 위치를 알려주는 층과 해당 시설물 층수를 함께 표시하고, 화살표 옆에 'UP' 또는 'STRAIGHT' 따위 진행 지침을 달아주면 된다.


스크린의 눈부심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해법으로는 스크린 표면에 햇빛을 분산시킬 수 있는 투명한 막을 덧씌우거나 스크린을 비스듬하게 설치해 반사되는 빛을 바닥으로 돌리면 된다.


또 모든 정보는 반드시 영어와 한글을 병기하고, 승강기 안에 층별 시설물 안내도를 부착하는 등 미흡한 부분을 철저히 점검해서 보강하면 이용객이 훨씬 더 쉽고 편리하게 공항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학생들은 말했다.


이면우 교수는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공공 시설물은 무엇보다 이용자의 편의를 배려해서 '친절하게' 설계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개선하지 않으면 인천국제공항은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공항으로 낙인 찍힐 우려가 크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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