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들의 반란 "이래도 고기를 먹겠느냐”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0.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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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은 자원 낭비·환경 파괴 행위” 채식주의자 모임 급증
“우리는 먹고 싶다. 야/채/버/거!”

매주 일요일이면 서울 명동 거리에 생경한 구호가 울려 퍼진다. ‘맛있는 채식, 멋있는 채식, 건강한 채식’‘채식 사랑, 생명 사랑, 지구 사랑’ 같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푸른 생명 한국 채식 연합’(가칭·채식연합) 회원들. 오는 3월 단체 발족을 앞둔 이들이 첫 사업으로 패스트푸드 점에서 야채 버거를 판매하라고 촉구하는 시위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채식연합은 이같은 운동이 국내에 채식 문화를 확산하는 데 한 획을 그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실제로 서명 운동 참여자가 5천 명을 넘어서면 대표적인 패스트푸드점 몇 곳에 공개적으로 항의 서한을 띄우겠다는 것이 이들의 구상이다. 이는 아마도 채식주의자가 벌인 국내 최초의 집단 행동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채식연합 발기인이면서 하이텔 채식동호회(go VEGA) 운영자인 이광조씨(33·학원 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경우 야채 버거가 매달 1억 개 이상 팔릴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도 야채 버거냐 ‘동물 시체’ 버거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집단행동 나선 채식주의자

왜 채식인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건강 또는 종교 때문에 채식을 선택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1990년대 초 폭발적인 화제를 모으며, 장안의 고기 소비를 뚝 떨어뜨렸던 이상구 박사의 ‘뉴 스타트 건강법’ 또한 ‘채식=건강을 위한 선택’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채식주의자들은 다르다. 채식연합이 발족하는 모태가 된 것은 2∼3년 전부터 사이버 공간에 속속 등장한 채식 동호회였다. 1998년 11월과 1999년 8월 각각 문을 연 하이텔·천리안 채식 동호회는 2000년 1월 말 현재 3백여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회원의 절대 다수는 20∼30대. 다시 말해 팔팔한 건강을 자랑하는 젊은이들이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채식 인구가 확산되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미국 요식업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학생 가운데 20∼30%가 평소 채식을 즐긴다고 한다. 채식은 무엇 때문에 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일까.

개중에는 다이어트나 피부 미용을 위해 채식을 선택한 이도 있다. 그렇지만 젊은 채식주의자 대다수는 다음과 같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동물 보호를 위해 채식을 선택한 집단이다.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다니는 김은정씨(30)는 학부 시절 집에서 기르던 개가 실종된 뒤 채식으로 돌아섰다. 주변 사람들은 개장수가 잡아갔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나에게 친구이자 가족인 동물이 다른 사람에게는 음식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인 이원복씨(36) 또한 대학 시절 어느날 식탁에서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무심코 대해 온 고기 반찬이 어떤 경로를 거쳐 밥상까지 올랐을지 곰곰히 따지는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소·돼지·닭의 처연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뒤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이씨는 현재 동물학대방지연합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들 동물 보호론자는 동물에게도 죽음과 고통에서 벗어날 최소한의 권리(동물권)가 있다며, 비인간적인 사육과 도살 방법을 문제삼는다. 태어나자마자 거세된 채 성장 호르몬과 항생제를 맞으며 압축 성장하는 송아지, 죽을 때까지 상대를 쪼며 싸우는 성질 때문에 부리를 인두로 지져야 하는 닭. 기계화된 도살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될 이들 동물 ‘친구’를 위해 동물 보호론자는 기꺼이 육식을 포기한다.

두 번째는 환경·생태학적인 이유로 채식을 선택한 집단이다. 10년 전 명상에 빠져들며 육식을 끊게 되었다는 이광조씨. 그러나 이것이 개인적인 결단이었던 만큼 회식 자리 같은 데서 가끔 ‘변절’하기도 했다는 이씨가 말 그대로 확고한 채식‘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초·중반 국내에 하나 둘씩 들어 온 외국 환경·생태 학자의 논문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고기 1인분 얻을 곡물로 22명 생존 가능

소에게 먹이면 한 사람분의 고기와 우유밖에 얻을 수 없는 콩과 옥수수(1,350㎏)를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 22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학자들의 경고는 그의 채식에 시대적인 정당성과 필연성을 부여했다. ‘채식은 동물 애호를 떠나 아사·질병·환경 오염을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국제채식주의자동맹(IVU)의 정의 또한 그에게 힘을 주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재미교포 환경운동가 대니 서씨가 채식주의자임을 밝혀 화제를 모았듯, 고기 소비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것이 국제 환경운동의 새로운 흐름이기도 하다. 지난해 시사 주간지 <타임>(11월8일자)에는 ‘아직도 고기를 먹을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쇠고기 1㎏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곡물 7㎏이 필요하며, 이 정도 분량의 곡물을 기르려면 물 7,000㎏이 필요하다. 곧 햄버거 1개를 포기하면 마흔 번 샤워할 물을 아끼는 셈이다.

나아가 가축 사료용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화석 연료가 사용된다. 쇠고기로부터 단백질 1kcal를 얻기 위해 소요되는 화석 연료는 78kcal이다. 반면 콩에서 단백질 1kcal를 얻기 위해 소요되는 화석 연료는 2kcal면 충분하다. 미국의 영양학자인 프랜시스 무어 라페가 일찍이 지적한 대로, 이처럼 고기 중심의 식사법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낭비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녹색평론선집>).

육식은 자원 낭비일 뿐 아니라 환경 파괴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환경론자들의 지적이다. 1960년대 이래 중앙아메리카 숲 가운데 25% 이상이 목초지 조성을 위해 벌채되었다. 열대 우림이 파괴됨으로써 멸종된 생물종만 천여 종에 이른다(<새로운 미국을 위한 다이어트>, 존 로빈스). 과도한 방목은 전지구적인 사막화 또한 가속화시킨다.

더욱이 화석 연료를 태워 가축 사료를 생산하고 실어 나를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지구 온난화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소가 내뿜는 메탄 가스 또한 지구를 데우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메탄 가스는 온실 가스의 18% 가량을 차지하는데, 이 중 15%가 가축 분뇨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가이아 이론을 제창한 제임스 러브록은 연소(combustion), 기계 톱(chain saw)과 더불어 가축(cattle)을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는 치명적인 세 가지 요인(3C)으로 꼽았다.

뿐만 아니다. 환경·에너지·식량 부문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월드워치 연구소에 따르면, 소를 비롯한 가축은 지구에서 생산되는 곡물 가운데 3분의 1을 먹어 치우고 있다. 미국은 상황이 더욱 심각해, 전국토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 이상이 가축의 먹이로 제공된다.

이를 두고 미국의 환경운동가 제레미 리프킨은 ‘곡물이 사람이 아니라 가축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그러나 거의 인식되어 있지 않은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가축이 풀 아닌 곡물을 먹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들어서이다. 가축 먹이를 완전히 풀로 바꾸면 1억3천만t의 곡물을 절약해 4억 명이 넘는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코넬 대학 데이비드 피멘텔 박사의 추정이다(전세계에서 매년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약 2천만 명이다).


채식인을 ‘왕따’ 놓는 한국 사회

유제품은 먹지만 달걀은 먹지 않는 락토(lacto) 채식주의자, 유제품·달걀을 모두 먹는 락토 오버(lacto-ovo) 채식주의자, 벌꿀이나 유제품마저 입에 대지 않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s)에 이르기까지 채식연합에 속한 채식주의자의 면면은 다양하다. 그러나 채식의 사회적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점차 ‘확신범’이자 ‘채식 전도사’로 변모하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물론 채식을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동물성 단백질 신화’는 이들을 괴롭히는 첫 번째 걸림돌이다. ‘동물성 단백질과 식물성 단백질은 1 대 1로 섭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라는 고전적 정의가 영양학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채식주의자는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44쪽 딸린 기사 참조).


채식인을 ‘왕따’시키는 한국 사회 특유의 분위기는 채식주의자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시킬 때도 ‘어묵 빼고요’를 덧붙여야 하는 이들로서는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 내지 삐딱한 시선이 못내 부담스럽다. 더욱이 웬만한 식당치고 한국에서 채식주의자가 선택할 수 있는 메뉴는 ‘고기 빼고 달걀 뺀’비빔밥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채식은 지구와 환경을 살리는 가장 손쉬운 실천 방법이며, 따라서 새 천 년은 ‘채식 밀레니엄’이 되어야 한다고 채식연합은 강조한다. 채식을 실천하다 보니 생명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광조씨는, 채식 이후 차마 동물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을 수 없어 비닐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다가 회사에서 해고된 일이 있다. 이를테면 채식에 ‘밥줄’을 걸었던 셈인데, 이씨 같은 이에게 채식은 더 이상 식습관 문제가 아니라 삶의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고기에 이미 맛을 들인 한국 사회가 채식주의자의 주장에 어느 정도 귀를 기울일지는 알 수 없다. 농림부 통계에 따르면, 1970년과 비교해 오늘날 한국의 육류 소비는 6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고기 소비 유형이 환경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변모해 왔다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한 예로 인도에서는 본래 소의 살생을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 전 600년께 전쟁·가뭄·기근이 닥치며 소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같은 환경적 고갈 상태에서 ‘동물 살생을 금한 세계 최초의 종교’ 불교가 탄생했다는 것이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주장이다.
채식은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

앞으로 50년 사이에 미국인의 식습관에 혁명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는 데이비드 피멘텔의 전망도 이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오는 2060년이 되면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는 데 반해 경작지 면적은 38%로 줄어들고, 화석 연료는 완전히 고갈된다. 이때가 되면 소·돼지·닭이 먹는 곡물 전부를 인간이 먹게 되리라는 것이 피멘텔의 예견이다. 그의 암울한 시나리오에 따르면, 만약 식습관이 바뀌지 않을 경우 미국은 그 해결책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채식주의자는 식량·물·화석 연료가 고갈되는 문명사적 위기 상황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선각자 집단일지도 모른다. 제레미 리프킨의 말마따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그것은 지구 및 인류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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