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백서에 담긴 ‘요지경 국보법’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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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국가보안법 종합백서 펴내…17대 국회에 의견서 제출 계획도
17대 국회 개원과 함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를 것으로 보이는 국가보안법(국보법)에 대한 종합 백서가 나왔다. 6월2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내놓은 <국가보안법 인권 실태 보고서>는 1989년 박원순 변호사가 발간한 세 권짜리 <국가보안법 연구> 이후, 국보법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새로운 버전이다. 사실, 지난 10여 년간 국보법 폐지나 강화를 주장한 쪽 모두 목소리만 컸지, 국보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드물었다.

모두 5백70여 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의뢰받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작품이다. 민가협 소속 송소연 총무를 비롯해, 채은아·박성희·조미영·한지연 간사 등 ‘여걸 파이브’가 지난 1년 동안 구슬땀을 흘렸다. 조사의 공정성을 위해, 증언을 듣기 힘든 1985년 이전 자료는 정부가 발간한 자료에 근거했다. 광복 전후의 신문 기사도 찾았고, <사법연감> 등 정부 발간 자료도 꼼꼼히 조사했다. 송총무는 “지난 1년간의 작업은 기록을 정리하는 시간이었을 뿐, 보고서에는 민가협 어머니들이 1985년부터 팔아온 발품이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시대의 자화상이 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술주정 한마디 때문에 입건·구속되기도

국보법은 1948년 12월1일 제정되었다. 이후 국보법은 시대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프로크루테스 침대’였다. 백서에 따르면, 1949년 1월4일 가수 남인수씨도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낙화유수> 등을 히트시킨 당대 최고 가수마저 좌익 문화 조직과 관련되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서울시경 사찰과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백서 152쪽).

국보법은 1960~197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공화당은 공산당보다 못하다.’ 1969년 술에 취해 홧김에 한 말은 징역 1년6개월에 해당하는 중죄였고, ‘김일성이 정치를 잘한다’는 객기어린 취중 말도 찬양 고무죄에 해당했다. 그런데 이런 ‘막걸리 보안법’은 전두환 정권 때까지 서슬이 퍼랬다. 1986년 5월20일 도 아무개씨(당시 32세)는 술에 취해 ‘김대중 만세, 김일성 만세, 김정일 만세’를 외쳤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보법은 ‘디지털 키드’도 비켜 가지 않았다. 1993년 11월18일 구속된 김형렬씨는 사이버 국보법 위반 1호다. 김씨는 천리안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어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로 구속되었다. 진상호씨도 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에 ‘공산당 선언’ 전문을 실었다는 이유로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인 1994년 일이다. 공산당 선언뿐 아니라 북한 사이트까지 볼 수 있는 인터넷 시대에 되돌아보면 어이없지만, 법원은 당시 진씨에게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번 보고서에는 소설가 조정래씨나 리영희 교수 등 유명한 국보법 위반 사건뿐 아니라, 6·15 공동 선언 이후에도 계속되는 국보법 위반 사례까지 담았다. 5월31일 현재 17명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되어 있다.

보고서를 발간한 국가인권위원회는 7월 중순 17대 국회에 국가보안법에 대한 종합 의견서를 낼 계획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은 구속력이 없지만, 국보법에 대한 본격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도 17대 국회가 개원하면 의견서를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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