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최대 정유공장 살리려 일본에 손짓
  • 도쿄.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6.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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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중인 김정우 대외경협위원장, 종합상사들과 접촉하며 승리화학기업소 재가동 모색
 
9월에 있을 예정인 ‘나진·선봉 지대 국제 비즈니스 포럼’ 설명회 행사를 위해 7월14~26일 일본을 공식 방문 중인 김정우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 일행과 일본의 주요 종합상사들이 비공개로 접촉한 내용의 일부가 밝혀졌다. 김정우 위원장측과 접촉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우 위원장 일행은 이번 방일 기간에 일본의 3대 종합상사인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와 접촉해 나진·선봉 지대의 승리화학연합기업소 재가동 문제를 집중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이미 지난 주말에 미쓰비시측과 비공개 협의가 끝난 상태이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우 위원장 일행은 국제적인 원유 딜러를 겸하고 있는 일본 종합상사들이 현재 원유 공급이 중단되어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승리화학연합기업소에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줄 경우 북한이 양산하고 있는 철광석과 비철금속으로 그 비용을 상계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북한측은 승리화학연합기업소와 원유 공급 협정을 체결한 일본 종합상사에 대해서는 석유 정제와 나프타 분해 등 연관 산업에 대한 독점적 진출권을 보장하겠다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측이 이처럼 원유 공급과 철광석·비철금속 구상 무역 외에도 연관 산업에 대한 독점 진출권 보장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이유에 대해 이 소식통은 ‘단일 프로젝트 베이스로 일본 종합상사들과 협의할 경우 투자 타당성 조사에 신중한 일본 기업들이 선뜻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연관 산업까지 일괄안으로 제시해 이들의 투자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미쓰이 물산, 적극적인 반응 보여 관심 집중

북한측의 이같은 제안에 대한 일본 종합상사들의 반응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일본 종합상사들은 북·일 수교와 북한의 채무 불이행 때문에 종합상사 단위의 북한 진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이라는 것이 일본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미·북한 관계 개선 일정에 따라 북·일 수교 교섭 재개도 시간 문제로 다가온 상황을 감안한다면 종합상사의 본격 진출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한 예로 미쓰이 물산은 김정우 위원장과의 공개 면담 일정을 잡아놓는 등 대단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7월15일 투자설명회가 열린 도쿄 록본기 소재 국제문화회관 현장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정우 위원장의 도쿄내 숙소였던 록본기의 국제문화회관이 미쓰이 회장의 개인 소유라는 얘기가 있을 뿐 아니라, 방일 기간에 미쓰이 본사와의 공식 면담은 물론 미쓰이의 자회사인 도요엔지니어링·신화물산 등과 두 차례 공식 면담 일정까지 잡았다.

무엇보다도 9월의 나진·선봉 투자 포럼을 앞두고 투자 분위기가 상승 무드를 타고 있는 시점에서 승리화학연합기업소라는 북한의 최고 관심 사업체를 놓고 일본 종합상사들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김정우 위원장이 일본 종합상사들과 재가동 문제를 집중 협의하고 있는 승리화학연합기업소는 의주에 있는 봉화화학공장과 더불어 북한의 양대 정유회사이다. 북한이 처리할 수 있는 원유 처리량 연간 3백50만t 중 봉화화학공장이 약 1백50만t을 처리해온 반면 승리화학연합기업소는 약 2백만t을 처리해 왔다. 그러나 중국산 원유를 처리하고 있는 봉화화학공장이 현재까지 약 백만t 처리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옛 소련과 중동산 원유를 처리해온 승리화학기업소는 지난 몇 년간 가동이 중지되어 왔다. 중동산 원유는 주로 이란과 리비아로부터 백만t 정도 공급되어 왔는데 80년대 초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이후 이란산 원유 공급이 격감하기 시작하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옛 소련으로부터 들여오던 원유 약 백만t도 소련이 해체된 이후 한때 6만t까지 줄어들었다가 94년부터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기업 참여 가능성은 원천 배제

북한 처지에서 보면 승리화학기업소의 재가동 문제는 현재 석유 부족으로 침체 상태에 떨어진 북한내 산업시설 가동 문제와 직결될 뿐 아니라 원유 정제 후 발생하는 나프타 분해산업이 경공업의 출발점이 되는 석유화학산업의 육성과 직결된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그동안 승리화학기업소 재가동 문제에 사활적인 관심을 가지고 외자 유치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94년부터는 미국의 스탠턴그룹과 집중적인 협의를 벌여 한때 외자 유치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탠턴그룹과의 합작은 북한 당국이 기대했던 만큼 진행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첫째 이유는, 스탠턴그룹과 마찬가지로 승리화학연합기업소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국제 석유 메이저들의 방해가 거론되고 있다. 두번째 이유는, 외화가 부족한 북한이 철광석이나 비철금속으로 대금을 상환할 도리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스탠턴그룹이나 미국계 석유 메이저들이 위험 부담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스탠턴그룹과의 사업 진행과 병행해 일본 종합상사들을 떠올리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런 내부 사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에 김정우 위원장이 집중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일본의 3대 종합상사는 국제적인 원유 딜러 사업을 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철금속의 국제 유통망에도 거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다. 한 예로 스미토모 회사는 최근 국제적인 구리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비철금속의 국제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회사이다. 따라서 북한측은 일본 종합상사들의 이같은 속성상 원유 대금과 철광석·비철금속의 상계라는 조건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내에서는 석유화학 분야가 주력 업종인 LG그룹이 그동안 승리화학연합기업소 재가동 문제에 관심을 보여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번 김정우 방일단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그 이유는 LG그룹의 기업 규모로는 이 사업을 감당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북한의 국책 사업인 승리화학연합기업소를 한국 기업에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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