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천국의 신화>가 음란물이라니"
  • 시사저널안희태 (ahnphoto@sisapress.com)
  • 승인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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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만화가 이현세씨 유죄 판결후 “청소년보호법 폐지” 목청 높여
혹시나 했던 만화계는 역시나 하는 허탈감에 빠졌다. 지난 7월18일 서울지법 김종필 판사(형사 1단독)는 <천국의 신화>의 작가 이현세씨에게 청소년보호법 위반 혐의로 벌금 3백만원을 선고했다.

이현세씨는 1998년 약식 재판에서 벌금 3백만원을 선고받은 뒤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당시 미성년자보호법 위반). 만화계는 이후 3년 동안 선고가 미루어져 왔고, 최근 사법부의 판단이 유연해진 것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가 유죄 판결이 나자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7월21일 (사)한국만화가협회를 비롯한 문화 단체 22개가 공동으로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이현세씨(44)는 ‘각오했던 일’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사회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지만, 사법부가 ‘기획 수사’한 사건인 만큼 쉽게 양보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창작의 자유에 관해 고심한 흔적이 보이지만 결국 판결을 위해 논리를 억지로 짜깁기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문제가 된 <천국의 신화>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신화를 바탕으로 창세기부터 환웅 시대를 거쳐 발해 멸망까지를 그리는 대하 역사 만화. 총 100 권짜리로 기획되었으나 현재 성인판은 8권, 청소년용은 5권까지 출간된 뒤 출판이 중지되었다.


“만화 얕보고 ‘청소년 유해’ 덤터기”

사법부가 문제 삼은 대목은 집단 성교 장면이나 수간 등에 나타난 음란성과, 인간과 짐승이 벌이는 전투 장면의 잔인성이다. 김종필 판사는 판결문에서 ‘성인에게도 난해하고 선정적인 작품이 초등학생도 볼 수 있는 소년용으로 제작되어 배포되었다는 것은 청소년의 성욕을 자극하고 정상적인 도의 관념을 해친다는 점에서 문제다’라면서 ‘자식들에게 과연 이 만화를 보여주어도 괜찮을지 따졌을 때 유해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만화계가 문제 삼는 대목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영화 <거짓말>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처리와 비교할 때 만화라는 매체를 경시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사)한국만화가협회 간사 안중규씨는, 영화 <거짓말> 사건 때 검찰은 소재를 음란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사서 무혐의로 판단했으나, 만화 <천국의 만화>는 수간과 집단 성교가 나온다는 사실만을 문제 삼았다고 지적했다. 즉 만화의 경우 작가가 어떤 표현 방식을 택했는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씨는 “집단 성행위와 동물과의 성교는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하던 시기에 존재하던 신화적인 사건이며, 더구나 청소년용에는 매우 우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작가의 의도를 철저히 무시했다”라고 지적했다.


인터넷에 4개 국어로 번역해 연재

또 하나는 ‘부모 처지가 되어 판단했다’는 판결문에서 알 수 있듯이, 청소년 보호의 기준이 지극히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이씨는 간행물 심의 기관인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적절한 심사후 납본필 결정을 내렸는데도 단지 청소년에게 유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준으로 음란물 판정을 내린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화계의 대응은 부산하다. 유죄 판결이 나오던 날 긴급 발족한 한국만화가협회 만화탄압비상대책위원회(회장 이두호)는 지난 7월23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침묵 시위를 벌인 데 이어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는 그동안 그들이 주도해 온 청소년보호법 폐지 논의를 범시민운동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영화는 보호받는데 만화는 왜 안되느냐’고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보호법이라는 옥상옥이 있는 한 앞으로도 당국의 과잉 감시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한편 이현세씨는 만화 전문 인터넷 사이트인 코믹스투데이(www. comicstoday.com)의 성인 코너 ‘X-게이트’에 <천국의 신화>를 연재할 계획인데 영어·일어·중국어로도 번역되어 게재된다. 코믹스 투데이를 운영하고 있는 조승진씨는, 지금까지 출간된 내용을 7월24일부터 매주 한 권씩 연재한 뒤 네티즌의 토론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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