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일보 어디로 가나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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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단회의 결정 앞두고 ‘뒤숭숭’ 경영진 무능·시장 악화로 위기 초래
“아마 편집국 기자들 치고 경쟁지로부터 콜(스카우트 제의)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4·15총선이 끝나고 채 이틀이 안 되어 마치 금기가 풀리듯 사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 후배 기자는 보고 라인 위 선배 3명이 한꺼번에 사라져 허탈해했다. 술자리에서 조·중·동을 열심히 비판하던 동료가 3일 뒤 그 중 한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다.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한국일보 편집국 기자)

한국일보가 가혹한 운명의 8월을 보내고 있다. 2002년 9월 은행 관리에 들어간 이후 최대 위기다. 회사는 현금이 부족해 직원들에게 7월분 월급을 주지 못했다. 기자를 포함한 직원들은 8월6일에야 겨우 월급의 절반을 수령했다. 채권단회의가 8월 중 열리는데 회의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뒤숭숭하다. 채권단 실사 결과 회사를 살리는 것보다 청산하는 쪽이 더 가치가 높은 것으로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경영이 악화하자 편집국도 술렁이고 있다. 한 5년차 기자는 “요즘은 취재원을 만나기가 두렵다. 어제 한 정치인을 만났는데 한국일보 요즘 어렵지 않느냐며 동정했다. 요즘 만나자마자 그런 인사부터 건네는 취재원 때문에 마음이 상한다”라고 말했다. 편집국 고재학 차장은 “한국일보가 견습 교육을 강하게 시키는 걸로 유명했지만 요즘은 그만둘까 봐 그렇게도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한국일보 기자 26명이 자리를 옮겼다고 밝혔다. 그 가운데는 DJ 정부 때 이용호·김승현 게이트를 추적 보도해 쾌거를 이룬 주역 3명도 있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모두 조선일보로 옮겨갔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가 참여정부를 흔들 만한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한국일보 팀을 기획 스카우트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떠나는 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원망보다는 자조에 가깝다. 고재학 차장은 “예전에는 사직서를 내는 사람 있으면 다리 붙잡고 술 먹이면서 끝까지 붙잡았다. 지금은 사표가 오면 그냥 안부를 빌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작년에 사표를 썼다가 주변의 만류로 보류했던 기자들이 올해는 끝내 자리를 떠났다.
한 2년차 기자는 “A선배가 회사를 떠나 경쟁지로 옮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A기자는 후배들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았던 기자였다. 며칠 뒤 인근 술집에서 A선배 환송식이 열렸다. 술이 익자 몇몇 후배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팠지만 선배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말릴 명분이 없었다.”

한국일보 성원들에게 자존심 하락 못지 않게 고통스러운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다. “동료에게 전화가 왔기에 대신 받아보니 카드 회사에서 온 독촉 전화였다. 나 스스로도 7월 월급이 연체되자 현금 서비스를 쓸 수밖에 없었다.”

동요는 말단 기자에서 상층부까지 이어진다. 8월3일 박진열 편집국장이 사의를 표했다. 그는 이미 7월22일에도 사표를 낸 적이 있었다. 박국장은 과거 회사 경영 부서에 일하다 편집국으로 내려온 사람이었다. 한 기자는 “평기자들은 편집국에 오래 몸 담은 사람을 원했는데, 그는 왠지 회장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사표 쓰기 직전 기자들이 편집국장 탄핵을 추진 중이었다”라고 말했다.

한 비상대책위 위원은 8월이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우리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은 아무리 늦어도 8월 안에 채권단 회의를 열어 결론을 낸다는 입장이다.

현재 한국일보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는 네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다. 회사, 채권단, 노조, 그리고 기자들이다. 한국일보 노조는 주로 제작 인력이며, 편집국 기자들의 다수는 노조가 아니라 기자협의회에 속해 있다.

이 네 이해관계자 가운데 먼저 카드를 꺼낸 것은 경영진이었다. 회사측은 7월22일 긴급설명회를 갖고 임금 삭감·누진제 폐지·가산제 폐지를 요청했다. 임금 삭감은 임금 3천만원 미만 연봉자는 10%, 3천만원 이상 4천만원 미만은 30%, 4천만원 이상은 50%를 감봉하는 안이다. 평균 삭감액은 20%쯤 된다. 이 혹독한 요구에 대해 직원 4백10명(58.5%)이 동의했다. 경영관리부 윤순환 부장은 “채권단회의를 앞두고 자구 노력을 보여줘야 했다. 노조원을 빼면 80%에 가까운 성원이 동의해, 나 스스로도 놀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일보 노조는 동의서 작성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노조측은 “장재구 회장이 3백억원을 증자하기로 해 놓고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채권단은 이를 방치하면서 사실상 한국일보를 서서히 말려 죽이려 하고 있다”라며 신뢰 회복 없이 일방적인 동의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노조(위원장 전민수)와 언론노조(위원장 신학림) 조합원 1백30명은 8월6일 한국일보 주채권단인 우리은행 본관을 찾아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채권단과 경영진의 야합 의혹을 제기하며 채권단의 직무 유기를 질타했다.
기자들도 회사 경영진에 대해 불신이 높다. 8월3일 기자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고재학)는 기사 마감 시간을 4시에서 5시로 늦추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한국일보 기자들은 미주한국일보에 원활히 기사를 제공하기 위해 타사보다 1시간 일찍 기사를 마감했다. 미주한국일보는 그동안 무료로 한국일보 기사를 이용해 왔다. 또 비대위는 7월치 월급 등 미지급된 급여·퇴직금·유보분에 대해 소송을 청구하기로 했다. 8월4일에는 차·부장단 선배 기자들도 기자들의 단계적 행동에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한 편집국 기자는 “지난 5월 장기영 창업주 부인 이문자 여사의 장례식에 갔더니 2세·3세들이 다들 외제차를 끌고 위세를 자랑하더라. 회사는 쓰러져 가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일가는 여전히 남의 세상 일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했다”라며 장씨 일가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기자들의 입장은 노조와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기자들은 이미 퇴직금 누진제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누진제 폐지가 쟁점이 아니다. 10년차 편집국 기자는 “장재구 회장을 너무 흔드는 것은 좋지 않다. 오너가 없으면 사원주주제를 할 수밖에 없는데, 경향신문 사례를 볼 때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다”라며 장회장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폈다. 장재구 회장은 증자를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언론사 아니었으면 3년 전에 망했을 것”

채권단 관계자는 “더 이상 언론사라고 해서 특혜는 없다. 한국일보는 언론사가 아니었으면 이미 3년 전에 망했다. 현 경영진의 문제 보다 시장 상황 악화가 근본 원인이다”고 말했다. 8월2일 끝난 실사 결과 청산 가치가 1천4백억원으로 존속 가치(1차 3백56억원 2차 9백35억원)보다 높았다. 그는 “실사 결과만 보고 채권단 회의에서 청산 결정을 내린다고 말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숫자일 뿐이고 잠재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일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한국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사표를 쓰고 야인이 된 전직 한국일보 기자와 인터뷰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꼭 한국일보가 어려워서만이 아니었다. 신문 시장 전반에 대해 비전이 없다고 느꼈다. 기자라는 신분의 사회적 위상도 달라졌다. 기자로 살기 힘든 때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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