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희망도, 일자리도 없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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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실직자 ‘겨우살이’ 르포/빚더미에 허덕, 가족 은 흩어져…사회 안전망 허술, 자활의 길도 ‘막막’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출범을 전후로 실업 기간이 장기화하면서 실직자들의 시름이 나날이 깊어가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아이들만 달랑 남겨두고 부부가 함께 가출하는가 하면, 하루 세끼를 해결하지 못해 자녀들의 식사를 결식 어린이에게 제공되는 점심 한끼로 때우게 하는 가정도 늘고 있다. 게다가 실직자가 거리를 헤매다가 공원에서 얼어 죽는 일까지 생겼다. 새해 들어 언론은 ‘경기가 바닥을 쳤다’느니, ‘올해 경기가 생각 밖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느니 하는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고 있지만, 사회 한구석에서는 하루살이가 어려워 사투를 벌이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근로사업은 언 발에 오줌 누기

서울 북부 실업자 사업단 노원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수철씨(45)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김씨가 직장을 잃은 때는 97년 10월. 김씨는 지난해 9월부터 석달간 산림청이 실시하는 공공근로사업, 이른바 ‘생명의 숲 가꾸기 사업’에 참여했고, 지난 1월18일부터 숲 가꾸기 사업에 다시 나가고 있지만, 97년 10월 이후 약 1년 3개월간 공공 근로 이외에는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못했다.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하기 전까지 그가 제대로 ‘벌이’를 한 것은 딱 한번. 지난해 여름 지하철 7호선에서 물난리가 났을 때 약 두 달 반 수해 복구 작업에 투입되어 일당을 받은 것이 고작이다.김씨가 실직한 동안 늘어난 것은 실직 고통을 달래느라 마신 술과, 여기저기에서 생활 자금으로 끌어다 쓴 빚뿐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주 5일씩, 일당 3만원을 받고 숲 가꾸기 현장인 광릉수목원으로 매일 아침 7시40분까지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했지만, 여기서 벌어들인 돈으로는 중1·중3짜리 자녀와 부인을 먹여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곗돈을 타서 은행에서 꾼 생활 자금 일부를 갚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천만원이 넘는 빚이 남아 있다.

김씨와 비슷한 무렵 공공 근로를 나가기 시작한 이재철씨(43)도 마찬가지이다. 자영업을 했던 이씨는 직원 9명과 함께 케이블 TV와 관련한 사무실을 운영하며 한번에 목돈 7천만원을 쥐어 보기도 한 사장님이었다. 이씨에게 IMF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한 때는 97년 11월. 이씨는 “그때 수금한 것을 빼고는 지금까지 돈 구경을 못했다”라고 푸념한다. 97년 11월 이후 약 6개월간 사무실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특별한 수익이 없이 인건비와 사무실 운영비로 월 2천만원씩 날린 끝에 두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이후 특별한 벌이가 없었던 이씨는, 사업을 벌이면서 끌어들였던 은행 빚 때문에 지금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다. 대출금 잔여분 이자가 연체되어 은행으로부터 재산을 압류하겠다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씨는 며칠 전 은행으로부터 ‘돈을 갚지 않으면 집달리를 보내겠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한창 경기가 좋을 때 은행 빚을 갚는다고 갚았지만, IMF 한파 이후 상황이 나빠지는 바람에 미처 갚지 못한 원금에, 이자까지 다달이 불어 지금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액수로 불어났다. 이씨는 “이도 저도 안돼 개인 파산을 신청하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털어놓는다.

이씨의 경우 특히 딱한 것은 노모가 풍을 맞아 벌써 4년째 거동을 못하고 누워 있는 데다, IMF 충격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겠다는 조바심으로 성급하게 차렸던 식당이 망하는 바람에 그나마 수중에 있던 돈 3천만원까지 날렸다는 사실이다. 이씨는 “친구들이 가볍게 술 한잔 하자고 해도 부담스럽다. 형제들한테서 전화 오는 것도 겁난다. 회사를 폐업한 뒤에 PC를 이용해 직장을 구해 보기도 했고, 건설 현장에 가서 취직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그나마 공공 근로를 나갈 수 있어 위안이 되지만, 이제는 진짜 앞날이 캄캄하다는 생각 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라고 무력감을 비친다.

김씨와 이씨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일는지도 모른다. 실업률 9.7%로 지난해 말 전국 평균치(7.9%)를 웃돌고, 그 가운데 70∼80%가 건설·일용 직 종사자인 것으로 파악된 인천 지역 실업자의 경우, 실직에 따른 고통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이다. 실업 극복을 위해 지난해 말 급조된 이 지역 한 민간 단체의 실무자 말에 따르면, 일부 저소득층 실직자 가정의 경우 자녀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데 당장 교복을 사 입힐 돈이 없어 애태우는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쌀이 떨어져 밀가루로 연명하는 가구도 늘고 있다는 것이다.장기 실직자들, 봄 되면 노숙자로 전락할 듯

IMF 한파 직후 직장을 잃은 김환식씨(가명·45) 가족의 경우를 보자. 노모와 함께 월세 15만원짜리 집에서 근근이 살던 김씨가 직장을 잃은 때는 지난해 초. 일자리를 잃어 수입이 사라지자 김씨네는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까지 까먹는 바람에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시골의 먼 친척집으로 가고, 김씨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가다듬은 김씨는 지난해 11월 춘천에 있는 기능 대학에 입학해 전기 내선 자격증을 얻기 위한 단기 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1만 세대 실직 가정 쌀 보내기’ 운동을 벌이는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 유진수 기획국장은 “지원 신청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눈물겨운 사연을 많이 들었다. 실직 상태가 장기화하면서 실직 가정 대부분이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극소수이긴 하지만 한 가족 전체가 아예 노숙 생활을 하는 사례도 목격했다”라고 말한다. 유씨의 말에 따르면, 노숙자·가출자 수가 줄어들었지만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겨울철이라는 계절 요인 덕분에 노숙·가출 양상이 주춤해졌을 뿐, 날씨가 풀리면 상당수 실직자가 다시 거리로 나설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98년 4/4 분기에 인천 지역 실업자 수는 10만 4천명. 97년 같은 기간에 비해 6만3천명(153.7%)이 늘었으며, 실업률 역시 5.6% 포인트 늘어났다. 그만큼 실업자 수와 실업률이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올해 초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12월 전국 실업자 수는 전 달에 비해 10만8천 명 늘어난 1백66만5천 명. 실업률은 전달에 비해 0.6% 포인트 올라간 7.9%를 기록했다. 물론 이마저도 정부 통계에 잡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실제 실업자 수와 실업률은 이를 훨씬 넘어서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구직 포기한 ‘실망 실업자’ 크게 늘어

더욱 큰 문제는 경기가 회복되리라는 장밋빛 전망과 달리 실업 사태가 올해 상반기에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점이다. 취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구직 활동을 아예 포기한 이른바 ‘실망 실업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2~3월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졸업생이 배출되고, 대기업 사업장에서 현재 진행 중인 구조 조정이 본격화하면 추가 실업자가 가세해 실업률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관계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실업 문제와 취업난은 이미 IMF 한파가 몰아닥칠 때 요란스럽게 신문 지면을 장식한 바 있지만, 그 여파는 일정 시간이 흐른 최근에야 본격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저소득층의 건설·일용 직 종사자 가운데에서 주로 발생하는 실망 실업자 문제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물론 마땅한 일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직자 자신이 구인 업체가 요구하는 자격에 미달인 점도 실망 실업을 장기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들은 대개 나이가 많거나, 재취업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에는 시간이 없고 경제적으로 사정이 너무 어려운 사람들이다.

실업 극복 운동을 벌이는 민간 단체들의 추산에 따르면, 실직자의 70~80%는 재취업하기 힘든 건설·일용 직 실직자이거나 여성 실직자이며, 이들의 나이는 대개 40대 이상이다. 전기·용접 일을 했다는 김수철씨는 “나이를 먹으면 망치질하던 손으로 용접봉을 잡기 어렵다. 손이 떨려 용접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몇 번 취업을 시도해 현장에서 일해 보기도 했지만 워낙 능률이 떨어져 더 버티지를 못했다. 지금은 사실상 재취업을 포기한 상태이다”라고 말한다.케이블 TV 설비업체 사장이었던 이재철씨도 비슷한 경우다. 이씨는 “구인 광고를 보고 컴퓨터 기기 제조업체를 찾아가기도 했고, 운전 기사 자리도 알아보았다. 모두 사십이 넘었다고 퇴짜를 놓았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취직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실직 기간이 장기화하면서 이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떠오르는 문제는 살아 남기이다. 정부는 공공근로사업·직업 훈련·실직자 대부 등에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수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장기 실직자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사회 안전망’에서 빠진 채 밑바닥을 헤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실직자를 지원하는 민간 단체들은 사회 안전망이 너무 헐겁다고 한결같이 지적한다. 서울북부실업자사업단 이오표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공공근로사업의 경우, 한번 나간 사람은 다음 번에는 쉬어야 한다. 또 한 가구에서 2명 이상은 사업장에 나갈 수 없다. 생활보호대상자 지정에도 문제가 있다. 생활보호대상자는 생활비가 지급되는 1종과, 의료보험 혜택·학자금 면제가 주어지는 2종이 있는데, 모두 일정한 나이가 넘어야 한다. 그나마 자격이 있더라도 가족 중 정기적으로 소득이 있거나, 본인이 공공근로사업 또는 취로사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제외된다.”

결국 현실적으로 구제가 시급한 40·50대 중장년층 실직자 가정에 정부 혜택이 돌아가기는 매우 어렵다는 얘기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들 대부분은 실업 급여를 이미 다 써버렸거나 은행 빚을 지고 있어 실직자 대부 등 융자 혜택을 받기도 어렵다. 이사무국장은 “바로 이 때문에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노숙자로 전락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말한다.

이같은 사정으로 민간 단체들의 실직자 지원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초기의 지원 위주 활동에서 실직자 자활을 돕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시래기 사업’ ‘숲 가꾸기 사업’ ‘음식물 쓰레기 사료화 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사랑의 시래기 사업은 시장에서 수거한 무청·배추청 따위를 말려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사업이다. 음식물 쓰레기 사료화 사업은 음식점에서 버리는 쓰레기를 모아 가축 사료로 만드는 일이다.

최근 인천시에 이 사업을 제안한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 윤관석 사무처장은 “이 사업을 인천 시내 1백30개 동 전역에서 실시할 경우, 쓰레기 수거 인력·홍보 요원·차량 기사 등으로 모두 2백50명에 이르는 실직자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다. 쓰레기를 사료화하는 기계 값이 비싸다는 것이 흠이지만 급한 대로 ‘시범 사업’으로 지정해 한 지역에서라도 먼저 실시하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막대한 실업 예산, 밑 빠진 독에 물붓기 될 수도

대규모 고용 창출을 위해 정부가 쏟아부은 돈은 지난해 공공근로사업 부문에만 1조원. 올해에는 약 2조원 정도를 추가로 투입할 계획이다. 또 실업자의 능력 개발과 재취업을 촉진하기 위해 실업자 직업 훈련 등에 8천6백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민간 단체의 반응은 냉담한 편이다. 7조9천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정부의 노력을 과소 평가할 수 없지만, 효율성이 담보되지 않는 예산 집행이라면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 증거로 재취업 훈련의 비효율성을 든다.

현장 경험이 있는 활동가들은 “훈련 기간이 너무 짧아 취업에 필요한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재취업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취직되리라는 보장이 없어 많은 실직자가 그저 훈련 수당과 교통비만 바라보고 참여하는 실정이다”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분야에 대해서는 훈련 수당·교육 내용·훈련 기간 등을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현재 대책이 마련되지 못한 ‘40대 이상 저소득층 실직자 자활’에 정부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전체 실업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날이면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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