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김기식 김혜정
  • 李文宰·金恩男 기자 ()
  • 승인 2000.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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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혁명’으로 거듭난‘제5권부’의 징검다리
세계 어느 나라 NGO가 정치 지형을 뒤흔들만큼 역동성을 갖고 있는가. 최근 국회의원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시민운동 단체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활동가의 세대 교체, ‘시민 없는 시민단체’ 등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개막과 더불어 막강한 ‘제 5권부’로 떠오른 시민운동 단체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대안이 아닐 수 없다. 1980년대 운동권 세대와 1990년대 신세대 활동가 사이를 연결하며 시민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두 키 퍼슨을 만났다.

“이번 낙선운동은 국민이 고용한 대리인인 국회의원에게 내린 파면 선고이자, 기성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임을 의미한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부대인을 맡고 있는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새로운 차원을 맞고 있는 시민운동의 오늘과 내일을 차분한 시선으로 읽고 있다.

그는 ‘단무지(단순·무식·과격) 운동권’의 전형이었다. 건국대 사건 직후 투옥돼 고문을 당한 뒤 ‘생활 속에 뿌리박은 운동을 하자’고 결심했고, 90년대 초반, 노동 운동 현장을 뒤로 하며 ‘이기는 운동을 하자’고 다짐했다. 그때 ‘참여 민주를 위한 사회인 연합’을 결성하고 생면부지인 박원순 변호사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를 찾아갔다. 뜻밖에도 세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했다. 1994년 9월 참여연대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김실장은 한국 사회에 위기가 닥친다면, 그것은 시민운동의 위기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 본다. 보수 기득권 세력에 대한 유일한 비판 세력인 시민 단체가 흔들린다면 가뜩이나 불안정한 민주 사회는 뿌리째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 단체는 ‘활동가를 재생산하지 못하는 위기’를 맞고 있지만, 김실장은 비관하지 않는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대와 1990년대 시민운동에 유입된 신세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그는, 역사적 소명 의식이 부족한 반면, 자기 만족을 우선하는 신세대들이 펼치는 운동이 오히려 보다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김기식 실장과 함께 2000년 총선반대시민연대 부대변인을 맡고 있는 서울환경운동연합 김혜정 사무처장은, 고향 울진에서 환경 문제에 눈을 떴다. 1988년 아버지가 위중해 휴학계를 내고 간병차 귀향했다가 핵 발전소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1989년 상경해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에 들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자.” 이후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최근 동강댐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줄곧 시민 운동의 전위에 서 왔다. 1993년 환경운동연합의 출범은 시민운동의 새 차원을 열었다. 반대 투쟁 일변도에서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이와 함께 국제적 연대도 강화했다.

운동가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김사무처장은 환경운동을 펼쳐오면서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한 이후, 한국 사회가 경제와 정치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미래 세대의 몫인 환경권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이 환경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 시민 사회가 갖고 있는 폭발력에 기대를 건다. 최근 정국을 강타한 낙선운동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시민 혁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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