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풍랑에 휘말린 청와대
  • 나권일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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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모임에는 예금보험공사(예보) 이형택 전무(60)를 비롯해 보물
탐사업자 오세천씨(34), 그리고 사업을 함께 추진해온 최도형·양순모
씨가 참석했다.


한 참석자가 “대통령께서 노벨상까지 수상했는데, 이제 보물만 나와주면
나라 경제가 확 풀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참석자가 “보물을
발굴해 경제가 살아나면 (대통령께) 이같은 효도가 어디 있겠냐”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일순 이형택씨의 표정이 밝아졌다. 참석자들은 “국익을
위한 사업이다. 모두 열심히 일해보자”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보물 발굴
사업에 매진하자고 다짐했다.



10분 뒤 소공동 ㄱ합동법률사무소로 자리를 옮긴 4명은 미리 준비한
‘매장물 발굴 협정서’에 서명했다. 매장물이 발굴되면 국고 귀속분과
제세공과금 53%를 제외한 나머지 47% 금액에 대해 이형택 15%·오세천
75%(68%는 기존 투자자와 추후 투자자 지분 포함)·최도형 5%·양순모
5%로 나누기로 하고, 이를 공증한 것이다.


최도형씨는 탐사업자 오씨에게 수년 동안 1억원, 양씨는 천만원 이상을
투자했기 때문에 지분 배당을 받았다. 이형택씨는 국정원과 해군 등
국가기관을 쫓아다니며 일반인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에 이들보다 3배나 많은 지분을 인정받았다. 이형택씨는 공증까지
하자는 오세천씨를 처음에는 말렸지만 수익 배당을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 날 ‘죽도 해저 매장물 발굴단’이 구성되었고, 대표는 발굴단장
격인 오씨가 맡았다. 오세천씨는 그 날 오후 이형택씨가 천거한 삼애인더스
대표 이용호씨(44)를 만나 50억원대 탐사 비용을 투자하라고 권유했다.


삼애인더스 대표 이용호씨는 그로부터 석 달 뒤 이들의 보물 탐사를
주가 조작의 재료로 삼아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을 울리고 1백54억원의
시세 차익을 챙기는 사기 행각을 벌였다. 동업자 4명이 마지막까지 실낱
같은 기대를 걸었던 죽도 앞바다 발굴 역시 지난해 11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한때 보물 사업에 ‘국운’이 걸렸다고 했던 이형택씨는 대통령 부부에게
누를 끼치고,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해군 등 국가기관까지 개입하게
만든 혐의로 서슬 퍼런 특검팀에 소환될 처지에 놓였다.


“최도형씨가 자세한 내막 알고 있을것”


한나라당은 지난 1월25일 ‘이형택씨가 20조원이나 되는 보물 발굴
프로젝트를 김대중 대통령 내외에게 사적으로라도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대통령까지 압박하고 나섰다.


현재 가장 큰 의문은 매장물 실재(實在) 여부조차 불투명한 황당한
보물 사업에 어떻게 이씨가 국가기관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이형택씨가 보물 발굴이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자발적으로 나섰다고 보는
것이다.



이형택씨는 1999년 12월께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난 뒤 국정원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씨는 또 2000년 1월에는 해군 참모총장을
직접 만나 도움을 요청한 뒤 거절당하자 국정원 경제단 과장과 ‘동업자’인
최도형씨를 대동하고 충남 계룡대 해군본부를 직접 찾아가 군 장비를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국정원이 현실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씨는 2000년 11월 보물 탐사업자 오세천씨에게 문제의
이용호씨를 소개했다. 이씨는 지난해 9월 국회 재경위 국정감사장에서
“죽도 앞바다에 정말 보물이 있는 줄 알았다. 보물이 나오면 나라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해 (이용호씨를) 소개해 줬다”라고 진술했다.


이기호 경제수석 역시 지난 1월26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익 차원에서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 국가정보원에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도록
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는 경제수석조차
나라 살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시사저널>은 보물 탐사 작업에 참여한 핵심 인사로부터
‘대통령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주목할 증언을 들었다. 탐사업자
오세천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형택씨는 청와대에도
지원을 부탁했다. 이씨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당시 대통령도
알고 계시는 사업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라고 밝혔다(21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다면 죽도 앞바다를 비롯해 오씨가 제시한 15곳의
보물 탐사는 1999년과 2000년 당시 어려웠던 국내 경제 상황에 보탬이
되겠다는 이형택씨의 ‘순진한’ 발상과 여기에 부화뇌동한 청와대·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국정원이 한때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보물 탐사업자들은 특히 이형택씨가 오세천씨를 만나기 전인 1999년
이씨의 보물 탐사 지원 작업을 막후에서 도운 최도형씨(56)가 그 내막을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제 살리기’를 역설했다. 정부가 주창했던 ‘신지식인’과 벤처
붐 역시 이같은 경제 살리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의 위기감은
김대중 대통령의 2001년 신년사에 잘 표현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지금 우리는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히 경제가 그렇습니다. 경기가 침체되어 있습니다. 주가가
폭락해 수백만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입고 있습니다. 실업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제 전반을 둘러싼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국민의
사기도 떨어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라며 무엇보다 경제
위기 타개를 위해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이형택씨가 팔을 걷어붙이고 국가기관에 보물 발굴 지원을 요청했던
1999∼2000년 상황 은 이같은 기류와 맞아떨어진다. ‘발굴 수익 20조원대’라는
황당해 보이는 이 사업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국가기관들이 나서서 점검해
보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탐사업자 오세천씨는 “이형택씨가 나를 만난 자리에서 ‘국고가
바닥 날 지경’이라고 큰 걱정을 하더라. 그래서 내가 추진하던 보물
사업을 경제 살리기의 한 방법으로 건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형택씨가 보물 발굴 사업을 주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용호씨와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형택씨는 2000년 8월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임야 2만7천여평을 시가의 2배인 2억8천만원을 받고 삼애인더스
법인에 팔았다. 이형택씨는 또 2000년 6월께 동화은행 시절 직장 후배인
허옥석씨를 통해 이용호씨로부터 최고급 골프채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 은행·보험회사를 관리·감독하는
예금보험공사 전무인 이씨를 구워 삶으려고 합병·매수 전문 기업인을
자처하는 이용호씨는 무던히 공을 들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삼애인더스는 지난해 6월 투자자들에게 보낸 ‘해저 유물 발굴
일정표 공개’라는 자료에서 “대한·국제·리젠트 화재에
대한 인수 의향서를 예금보험공사에 제출한 상태이다”라며 예금보험공사를
활용하려 했다(<시사저널> 제627호 참조).


보물 발굴, 국책 사업으로 추진했는지 밝혀야


삼애인더스는 그러나 인수의향서만 제출했을 뿐 경영 실사나 입찰
참여 등 실무 절차를 밟지 않아 인수 작업은 무산되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6∼7월 금감원이 내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들 부실 3사를
이용호씨가 놓쳤을 리가 없다고 보고 있다.


삼애인더스는 보물 탐사를 추진하면서 ‘국정원이 인공위성을 통해
금괴를 확인했다. 대통령의 친인척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흘려 주가 올리기를 시도했는데도 금융권 정보에 밝은
이형택씨는 이를 방관하거나 사실상 묵인했다.


따라서 ‘국익을 위해 보물 사업을 도왔다’는 이형택씨의 말을 100%
믿는다 해도, 이씨는 결과적으로 이용호씨의 주가 조작을 도왔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용호씨는 2000년 한 지인에게 처남 결혼에 보태 쓰라며 앉은 자리에서
지갑에 들어 있는 4백여만원을 모두 털어줄 정도로 손이 컸다.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에게 접근하기 위해 홍업씨와 친분이 있는 방송국
간부 이 아무개씨에게 천만원을 준 사실도 드러났다.


로비의 귀재인 이용호씨가 당시 예금보험공사 전무이던 이형택씨에게
보물 사업과 관련해 단 한푼도 주지 않았다는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보물 발굴이 과연 국책 사업으로 추진되었는지, 추진되었다면 대통령은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 사업 추진을 지휘한 또 다른 여권 실세는
없는지가 앞으로 특검이 밝혀야 할 이 사건의 핵심이다. 물론 이형택씨와
이용호씨 사이에 ‘검은 거래’가 있었다면 이 또한 투명하게 밝혀내야
할 것이다. 진도 앞바다 보물 파문은 이제 청와대 앞마당에까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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