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정치 3김과 크게 다를 것 없다"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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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여론조사/3명 중 2명 부정적 인식 "정치 보복 가능성 있다"도 63%


지난 1월30일 한나라당 의원·지구당위원장 연찬회 분임토의에서는 이회창 총재 개인에 대한 주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일선 당무에서 한 발짝 물러서 국가 지도자로서 중량감을 키워라, 전문가에만 의존하지 말고 일반 시민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얘기를 들어라, 너무 어려운 단어만 쓰지 말고 쉽고 대중적인 단어를 써라 등등.

제8 분임조 발표를 맡은 손태인 의원은 "이총재는 원래 대쪽과 법치주의로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DJ와 싸우다 보니 이제는 비슷해졌다"라고 민심을 전하면서, 이제는 뭔가 다른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시사저널>이 지난 1월31과 2월1일 실시한 이총재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이총재의 이러한 처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국민들은 이총재를 3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으며, 집권 후 이총재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회창 정치 노선 불분명하다"

사진설명 2김과 악수 : 지난해 봄 한 행사에서 JP·YS 등과 인사를 나누는 이회창 총재.

'1.5세대의 딜레마'. 이는 이총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하다. 1996년 대쪽 판사와 소신 총리라는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본격 입문할 때만 해도 이총재는 30여 년 동안 3김이 지배해 온 낡은 정치를 극복할 대안으로 주목되었다. 아직도 이총재 본인은 3김씨와 다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애써 이들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3김과 어울려 정쟁의 한복판을 헤쳐 오면서 이제 이총재는 3김 세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3김을 극복할 대안도 아닌, 어정쩡한 1.5세대 정치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5.0%가 '이총재가 3김씨와 별 차이가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3김보다 더 잘못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응답(11.0%)까지 합치면 부정적인 응답이 3분의 2를 차지한다. 야당 총재로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3김의 아류로 인식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깃발 부재'.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그동안 이총재가 여당의 압박에 맞서 반DJ·보수·영남에 기댄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서도 너무 깊이 빠졌다고 진단했다. 새로운 작품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홍준표 전 의원은 이총재의 이러한 문제점을 '수비형 리더십'이라고 불렀다. 이총재 자신만의 차별화한 비전을 내걸고 민심을 설득하는 창조적·공격적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이총재의 정치 노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0.2%가 '노선이 불분명하다'고 대답한 것은, 이총재가 자신만의 깃발을 세우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총재의 고유한 깃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이총재의 상표는 공정한 법치주의와 깨끗한 정치다. 지금도 이총재측은 이 깃발을 내세워 차기 대선을 돌파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3김과의 정쟁 와중에서 이 깃발은 적지 않게 퇴색했다.


부정부패 척결 능력에 회의적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총재가 집권하면 법에 따라 공정하게 정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52.4%가 긍정적인 기대를 나타냈고 45.1%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총재가 집권하면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54.7%가 '지금과 비슷할 것이다'라고 응답했고, '더 안 좋아질 것이다'라는 응답도 10.8%였다. 3명 가운데 2명은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정치 불신을 반영하는 수치이기도 하지만 법치주의·깨끗한 정치가 이총재의 거의 유일한 깃발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이다.

법치주의나 깨끗한 정치가 차기 대선을 돌파할 깃발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이러한 문제는 사회 문화적으로 뿌리가 깊은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차 바뀌는 것이지 어느 한 지도자에 의해 일거에 변화하기는 어려운 사안이다"라고 진단한다. 퇴색한 깃발을 다시 수선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깃발 부재'에 대해 이총재와 가까운 한 의원은 "DJ 정권이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YS와 JP가 노회하게 영향력을 복원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결과는 불가피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이총재는 여야 대치 상황을 '무조건 등원 선언'으로 풀어내는 등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는 의욕을 보였지만, 올해 초 안기부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또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총재의 한 측근은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예를 들어 시기상조론을 펴기도 한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역사적인 개혁 노선을 마음에 품기는 했을 것이나, 만일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깃발을 마음껏 휘둘렀으면 그 자리에 오르기가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총재 측근 가운데는 이총재가 집권하면 뭔가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새롭고 선명한 깃발 없이 차기 집권이 가능할 정도로 세를 모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지난 1월 말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의원과 지구당위원장 가운데 적지 않은 이가 이총재가 20∼40대 부동층과 비우호층에 과감하게 다가가야 하며, 이를 위해 세세한 당무에서 한 발짝 물러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총재 지지세가 제자리걸음을 못 면하고 있다는 점을 일선에서는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회창의 이미지 "차갑다" "독선적이다"

이총재가 3김과 차별성을 보이고 새로운 깃발을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장애로 지적되는 것은 이총재 주변 인물들이 쳐 놓은 '보수 장막'이다. 한나라당 부총재단과 주요 당직자들 다수는 과거 5·6공 때부터 여당을 해 온 보수파 인사이다.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은 이총재가 최근 남북 문제에서 국가보안법 고수, 조건부 김정일 답방 등 보수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것도 보수 장막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개혁파는 이들 과거 정권 출신 보수 인사들이 여론에 어둡고 도전 의지가 약해 야당을 이끌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비판한다. 새로운 인물들이 당의 주요 자리에 앉지 않고는 3김과 차별화한 새로운 깃발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총재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이총재가 수구적인 5·6공 세력들에게 계속 휘둘릴 경우에는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동참할 수 없다"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특히 지난해 5월 전당대회 직후가 16대 총선 승리를 원동력 삼아 면모를 일신할 기회였으나 이를 놓쳤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당시 이총재는 과거 민정당 출신 보수 인사들을 주요 당직에 임명해 '한나라당이 민정당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이총재의 생각은 일단 대선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총선 공천 후유증을 털어내고 당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참신한 인선보다 안전한 인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참신한 면모는 다음 당직 개편을 통해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 이총재의 인식이었다.

이러한 이총재측 판단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당시 보수파 일색의 당직 개편 때문에 한나라당과 이총재는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 일변도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고 진단하면서 "야당은 돈도 없고 힘도 없기 때문에 한번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다시 바꾸기가 쉽지 않다"라고 우려했다.

깃발 부재와 함께 이회창 정치의 또 다른 고민은 대중적 이미지 문제. 이총재를 놓고 차갑다, 협량(狹量)이다, 독하다 등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적지 않게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여론조사에서도 '이회창 총재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5.3%가 '차갑다'고 지적했다. '독선적이다'라는 응답도 32.1%에 달했다. '소신이 있다' '깨끗하다'는 긍정적인 응답은 20%를 약간 넘는 수준에 그쳤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정치 보복 이미지가 유권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월19일 정대 조계종 총무원장의 '정치 보복 발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번 여론조사에서도 '이총재가 집권하면 정치 보복이 있을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63.2%가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해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31.7%)의 두 배에 달했다.


대중적 친화력 부재, 약점으로 드러나

사진설명 시민 속으로 : 대중적 친화력이 부족한 총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 2월1일 지하철로 출근하며 승객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이총재의 이러한 '차갑고 무서운' 이미지는 이총재에 대한 비토 분위기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번 조사에서 '차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될 후보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수인 18.9%가 이총재를 지목했다. 12.5%를 기록한 이인제 최고위원과 비교할 때 비토율이 높은 편이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 문제는 대중적 친화력이 약하다는 이총재의 약점과 맞물리면서 그에게 적지 않은 고민거리를 던지고 있다. 이총재는 대중과 언론에 과도하게 영합해 대중적 친화력을 갖출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런 방식을 3김식 구태 정치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총재는 선천적으로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에다 평생을 판사로 일관한 탓에 비사교적인 편이다.

이러한 이총재의 특성은 연출과 과장이 없다는 장점도 되지만 대중과 교감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 2월1일 지하철 출근길에도 이총재는 광화문역 계단을 내려가면서 마주 올라오는 시민들에게 한마디 인사도, 손짓도 하지 않았다. 시민과의 접촉은 개찰구에 마중 나온 역장과의 악수가 처음이었다. 이총재 정도로 얼굴이 알려진 정치인이라면 으레 '안녕하십니까' 하면서 웃음과 손짓으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다가갈 법도 하건만 이총재는 그것을 못한다.

이총재의 엘리트 마인드에 대한 지적도 많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총재에게 '허점을 보이는 데 인색하지 말아라' '전문가나 관료 얘기만 듣지 말고 서민들의 투박한 얘기도 들으라'고 주문했다. 이번 여론조사의 이총재 이미지 문항에서도 '엘리트적이다'라는 응답이 15.1%를 차지했다. 일반인들 가운데도 이 점을 거북해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가령 이총재는 추상적이고 개념이 정확한 용어를 선호하다 보니 말이 어렵고 전달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IMF 극복론을 얘기하면서 "이제 아랫목이 따뜻해졌으니 곧 윗목도 나아질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비판하면서 "김정일이 회장이고 김대중은 전무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대중적 언어 구사가 이총재에게는 부족하다.


이회창은 '1.5세대 딜레마' 국민은 '이회창 딜레마'

사진설명 보수 또 보수 : 보수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도부의 면면 때문에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는 보수 기반을 강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지세를 확장하는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왼쪽은 한나라당 총재단 회의 모습.

경제 문제를 얘기할 때도 거시 경제 지표나 동향은 자주 얘기하지만 카드 불량자가 많이 늘었다든가 하는 서민 생활과 관련된 얘기는 듣기가 쉽지 않다. 이총재 주변에서는 이총재가 전문가와 관료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고 생활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듣고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차가운 이미지와 취약한 대중 친화력은 유권자들의 정서에 호소해야 하는 대중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특히 선거 전문가들에 따르면 유권자의 과반수를 넘는 부동층의 경우 전통적으로 논리적 판단보다는 인간적 매력이나 호감도 등 감성적 요인에 따라 지지자를 결정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이총재의 부정적 이미지는 부동층을 흡수할 탄성도(彈性度)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회창식 정치는 자기 자리를 굳게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7년 대통령이니 하며 이회창 대세론이 무섭게 확산되었지만 올해 들어 여권의 강공에 쉽게 휘청거리는 것도 이회창 정치의 뿌리가 아직 튼튼하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유권자들의 셋 중 둘은 '이총재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한다. 동시에 이총재가 3김 정치를 답습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도 3명에 2명꼴이고, 다섯 중에 한 사람은 이총재를 비토하고 있다. 3김 이후를 노리면서도 3김 정치와 다른 자신만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1.5세대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이총재. 그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이총재를 별로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이회창 딜레마'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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