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강도 세무 조사로 재벌 개혁 압박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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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없는 고강도 세무 조사로 경제 바로잡기 지원 사격
‘국세청을 주목하라.’ 요즘 기업의 정보 담당자들은 국세청 동향을 캐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국세청이 안기부와 함께 재벌 총수들이 해외에 뻬돌린 재산을 내사하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이들의 안테나에 탐지된 데 이어, 6월께부터는 10∼20명에 이르는 이른바‘도피 사범 명단’까지 공공연하게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뿐만이 아니다. 뒤가 켕기는 부자일수록 ‘나도 혹시 세무 조사 선상에 오른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국세청은 세금(국세)을 거두고 세무 조사를 해 탈세를 잡아내는 기관이다. 98년 예산 기준으로 국가 총세입의 87.6%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 운용의 중추이다. 이런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국세청은 단순히 세금을 거두는 기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런 본연의 업무에서 몇 발짝 더 나가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김대통령 ‘국세청의 힘’ 중시, 변화 요구

행태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크렘린’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는 것이 몸에 밴 국세청 사람들이지만, 요즘은 국민들에게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노라고 알리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지난 7월6일 매우 이례적으로 탈세자 명단을 공개하는 ‘도발’을 한 것이 좋은 예다. 국세청이 달라졌는가? 지금 국세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국세청이 뭔가 달라졌다면 그것은 우선 대통령이 그같은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정부조직법상 재정경제부의 외청이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 안기부’‘경제 검찰’로도 불리는 국세청은, 대통령이 이 기관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정치·사회적 역할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국세청이 66년 개청된 이래 실세 기관으로 행세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전임 대통령들도 국세청을 중요하게 보아 핵심 요직에 충성을 다하는 심복을 심었고, 세무 조사 기능을 국정 목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활용한 적이 있다. 하지만 김대통령처럼 국세청에 힘을 실어 주고 광범위하게 활용한 예는 없었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국세청에 대해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다. 오랜 야당 시절 국세청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 같다”라고 말한다. 과거 자신을 도운 기업주나 기업을 경영하는 당직자들이 국세청으로부터 세무 조사 위협을 받거나 실제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세청의 힘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DJ로서는 국세청과의 ‘악연’이 이 기관을 중용하게 만든 셈이다. 이 관계자는 또 최근의 개혁이나 사정 작업이 경제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국세청을 한층 더 활용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세청을 어떻게 활용하려 하는가는 4월14일 국세청 관서장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불로 소득자와 호화 사치 생활자에게 사회 정의에 알맞게 중과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적정·공평 과세로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또 김대통령은 구조 조정을 열심히 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세정 혜택을 주고 그렇지 않은 기업에 대해서는 엄격히 세금을 물려 기업 구조 조정을 적극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외자 유치에 각별히 노력해 달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김대통령이 IMF 체제 이후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다독거리면서 경제 개혁과 사정을 추진하는 전위대로 국세청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실제로 국세청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정확하게 대통령의 의중대로 움직여 왔다. 이건춘 청장은 3월7일 취임 일성으로 ‘음성 불로 소득과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국세청은 3∼6월 이들에 대한 1,2차 세무 조사에서 불로 소득자 9백69명이 탈세한 사실을 밝혀내고 2천4백53억원을 추징했다. 이 추징 세액은 이미 지난해 1년 간의 실적(9백72명, 2천3백31억원)을 뛰어넘은 것이다. 현재 6백49명에 대해 3차 조사를 벌이고 있다.

불로 소득자와 호화 사치 생활자를 대상으로 한 세무 조사가 계층간 위화감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을 갖는다면, 6월부터 벌이고 있는 변호사·의사·회계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 5천명에 대한 세무 조사는 조세 형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월급쟁이가 봉이냐’는 뿌리 깊은 형평성 논란을 잠재워 보려는 의도다. 부유층에 대한 상속세· 증여세 조사도 마찬가지다.

기업에 대한 세무 조사는 다른 각도에서 진행된다. 구조 조정을 촉진하기 위해서다. 국세청 조사국 최명해 조사1과장은 “국세청은 늘 해오던 대로 납세자가 제대로 세금을 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지만, 이런 세정 활동이 경제·사회적 여건 변화와 맞물리면서 부수 효과를 낳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기업 부채를 갚기 위해 총수가 개인 재산을 내놓는 등 모범적으로 구조 조정에 나서는 기업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것도, 세무 조사를 구조 조정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6월부터 한국은행 등 특수법인과 자회사를 포함한 공기업들에 대한 일제 세무 조사에 들어간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부실 기업주 재산 도피 내사에도 깊이 개입

부실 기업주에 대한 세무 조사와 일부 재벌 총수에 대한 은닉 재산 내사 작업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한 재벌 기업 정보 관계자는 “현정권은 부실 기업주에게 경제 파탄 책임을 묻고 빼돌린 재산을 토해내게 함으로써 이 돈을 구조 조정 재원으로 활용하려 한다”라고 분석한다.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은닉 재산을 구조 조정에 쓰면 국민의 혈세를 별로 들이지 않으면서 기업 구조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김태정 검찰총장이 기업 자금을 빼돌린 기업주를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국세청 등에 자진 신고하면 선처(불기소)하겠다고 밝힌 대목도 처벌보다 돈을 토해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최근 ㅅ그룹 ㅊ회장이 해외에 빼돌린 재산을 들여오겠다고 하자 검찰이 사법 처리를 면해 준 것이 좋은 예이다.

물론 부실 기업에 대한 세무 조사는 국세청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부도가 났거나 화의·법정관리 등을 신청한 기업의 경우 조세 채권(받아야 할 세금)이 얼마나 있는지를 국세청이 법원 등에 확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세청은 이 조사를 ‘긴급 조사’라고 부른다. 봉태열 조사국장은 “조세 채권을 확정하기 위해 세무 조사를 벌이지만, 이 과정에서 기업주가 기업 자금을 해외로 불법 유출하거나 은닉한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라며, 이들에 대한 세무 조사는 통상 작업일 뿐 사정 차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지난 7월 부실 기업주 및 음성 탈루 소득자를 고발한 조처 등이 기업주의 부실 경영 책임을 묻고, ‘기업은 죽어도 기업가는 산다’는 잘못된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국세청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사정 기관으로 비치는 것을 매우 걱정한다. 국세청은 세금 징수 기관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과 관련이 깊다 보니 경제난 극복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를 세정 차원에서 다스릴 수 있을 뿐이라는 주장(봉태열 국장)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국세청의 움직임은 넓은 의미에서 사정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국세청은 우선 국세통합전산망(TIS)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집적된 납세자 재산 정보 자료와 고도로 훈련된 특별 조사 요원을 2백∼3백 명(전체 조사 인력은 1백1개반, 6백43명인데, 8월 초 1백24개반 8백명으로 늘어난다)이나 거느리고 있는 막강한 조직이다. 어떤 사람의 재산 흐름을 추적하려고 할 때 활용하기에 이보다 좋은 조직은 대한민국에 없다.

국세청은 실제로 부실 기업주가 은닉한 재산을 내사하는 데 상당히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우선 검찰·안기부와 함께 ‘해외재산도피사범실무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이 기구에 참여하고 있는 국세청 국제조세국의 한 관계자는 국세청이 이 기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조금 들춰냈다’고 확인해 주었다. 조사국의 부실 기업주 세무 조사에서도 일부 재벌 총수가 기업 재산을 빼돌려 은닉한 혐의가 포착되었다. 이런 경로를 통해 박용학 대농그룹 명예회장, 박영일 미도파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의 비리가 드러났다. 이밖에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 4남 한근씨의 4백60억원 해외 은닉 사건이나 청구그룹 장수홍 회장 사건 등에서도 국세청이 초동 단계의 정보를 검찰에 넘긴 것으로 기업 정보 관계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물론 기업 재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부실 기업주 20여 명을 국세청 혼자 들추어낸 것은 아니다. 청와대 사정팀과 검찰·경찰 조사 관련 조직과 금융감독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 등도 정보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경제 사범 척결 흐름이 검찰 같은 사정 기관과 국세청·금감위·공정위 같은 조사 기관이 거의 다 나서서 정보를 서로 주고 받으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세청이 먼저 포착해 검찰에 넘기든 검찰이나 금감위가 혐의를 발견해 국세청에 좀더 정밀한 조사를 의뢰하든 국세청이 이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서울의 한 일선 세무서장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래 엄청난 강도로 정보 수집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선 세무관서의 1천5백명 남짓한 정보 수집반원들은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돌아다니고 있다. 여기서 걸러진 1차 탈세 혐의자 명단이 조사 요원들에게 넘어간다. 조사 요원들은 내사 과정을 거쳐 혐의가 확실해지면 세무 조사 대상자로 선정하고 본인에게도 통고한다”라며, 국세청이 이렇게 열심히 거의 모든 계층을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국세청은 대기업 사주와 그 가족에 관한 것은 통합 조사가 필요하니 본청 조사국에 넘기라는 주문도 일선 세무서에 해놓았다.

비리 공무원 자체 사정…국세청 사상 최대 규모

거의 모든 계층을 겹겹이 포위하다시피 해서 세무 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세청은 얼마전 자체 사정 결과도 내놓았다. 비리 공무원 2백70명을 밝혀내고 이 가운데 1백5명을 공직에서 추방했는데, 이같은 사정 규모는 국세청 개청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이 이주석 감사관의 설명이다.

국세청이 검찰 등 사정 기관의 칼날을 맞기 전에 자정 작업에 들어간 것은 먼저 ‘내 몸의 환부’부터 도려내야 자기네 활동이 정당성을 얻고 모양도 좋기 때문이다. 세무 공무원에 대한 국민들의 뿌리 깊은 부정적 인식을 의식한 것이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내부 비리 색출 작업은 청와대 지시 사항이었다. 1백36개 세무서 서장에게 2명씩 비리 공무원 명단을 제출하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본청과 지방청 감사관실의 감찰 요원들이 포착한 정보가 큰 영향을 미쳤다”라고 말했다.

국세청 근무 경험이 있는 재정경제부의 한 관계자 말에 따르면, 국세청은 무시무시한 조직이다. 힘이 절로 느껴지는 조직이다. 황제로 군림하는 재벌 총수들도 국세청 세무 조사에는 기가 죽는다. 국세청이 자금 출처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지난해 말 서울 강남에서 달러가 은행으로 쏟아져나온 소동은 한국 사회에서 국세청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잘 드러낸다.

국세청은 앞으로도 경제 개혁 추진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 최고 통치권자가 파괴력이 엄청난 이 집단을 선용(善用)하는 것이 정부도 살고 국민도 사는 길일 것이다. 청와대 이강래 정무수석비서관은 “김대중 정부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다른 정권과의 차별성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력 행사의 민주성과 도덕성이다. 국세청은 ‘칼’이다. 잘못 쓰면 안 쓰느니만 못하다. 결코 특정 기업이나 특정인을 겨냥해 세무 사찰을 의도적으로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108번지 10층짜리 황토색 건물에 자리잡은 국세청. 김대중 정권에서 국세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DJ 개혁의 신병기인 국세청의 힘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 것인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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