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은 끝났지만 전쟁은 안 끝났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r)
  • 승인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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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시사저널> 바그다드 특파원은 후세인이 체포되기 직전 티크리트에서 ‘붉은 새벽’ 작전을 펼치는 미군의 움직임을 직접 확인했다.. 또한 신특파원은 저항 세력의 핵심 본거지인 ‘죽음의 땅’ 사마라에 잠?
"탕, 탕, 탕.” 미군이 M16 A4 소총을 발사하자 시위대는 다급히 몸을 숙이고 골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모여서 행진을 계속했다. 시위대는 2천명이 넘었다. 군중은 “미군은 물러가라” “알라는 위대하다” 구호를 외치며 서슴없이 미군 브래들리 전차를 향해 전진했다. 상황이 위급해진 것을 느낀 미군은 지프를 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차 4대가 포신을 시위대 쪽으로 항한 채 황급히 후퇴했다. 시민들은 전차를 쫓아 1km 넘게 달려갔다. 몇몇 청년과 아이 들이 길가의 돌을 줍는 모습이 보였다.

미군 전차가 기지 앞에서 잠시 정차하자 시민들은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돌 수십 개가 전차 위에 있는 병사들에게 날아갔고 그 중 몇 개는 헬멧을 맞추었다. 군인들은 팔을 들어 얼굴을 막으며 버티다 45° 전방으로 총을 쏘면서 시민들을 물리치려 했다. 하지만 군중은 총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살 폭탄 테러를 미군의 공격으로 믿는 시민들

20분 가량, 시위대와 미군 사이에 이런 추격과 ‘돌멩이 교전’이 이어졌다. 12월14일 사담 후세인 체포가 발표되던 날 기자가 현장에서 목격한 이라크의 모습이다.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도시 라마디에서 발생한 이 충돌에서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시민들은 무기를 쓰지 않았다.

 
후세인이 체포된 것은 12월13일 오후 8시30분(현지 시각)께였다. 다음날(14일) 아침 8시께, 라마디의 이라크 경찰서 정문 앞에서 자살 폭탄 공격으로 보이는 큰 폭발이 있었다. 후세인이 체포된 후 첫 테러였다. 이 사고로 17명이 죽고 33명이 다쳤다.

기자가 테러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14일 오후 1시께. 후세인 체포 뉴스가 미처 방송을 타기 전이었다. 현장에는 미군 브래들리 전차 4대와 지프 8대, 병사 40여 명이 진을 치고 구경꾼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당초 문이 달려 있었던 벽은 흔적만 남긴 채 없어졌다. 그 앞에는 지름 4m인 거대한 구덩이가 남아 있었다. 자살 폭탄에 이용된 차량도 산산조각이 나 보이지 않았다. 10여m 옆에 있던 차량이 불에 탄 채 골격만 남아 있었고, 그 밑에는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미군이 물을 부어 피를 씻고 있었다. 이 날 죽은 사람 가운데는 아이들도 있었다. 인근 여자 초등학교에 등교하던 학생들이었다. 일가족 4명도 한 차에서 세상을 떴다.

현장을 둘러싼 라마디 시민들은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졌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내가 직접 봤다. 미사일 로켓이 날아왔다. 오늘 아침 미군이 이라크 경찰에게 라마디 사람들을 체포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라크 경찰이 협조하지 않았다. 그 보복으로 미국이 공격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믿기 힘든 말이었다. 미국은 굳이 폭탄을 쓰지 않아도 자기들의 힘을 보여줄 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압살 드래시(18)라는, 직업이 화가라는 청년은 “차량 자살 폭탄 공격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친구는 목격담을 전해준 뒤 ‘머니’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현장에서 사고 조사를 하고 있던 미군행정청(CPA) 소속 휴 조지 헤건은 “정체 모를 차가 경찰서 문 앞에 정차했고, 다음에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차를 몰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날 근처에서 두 번 정도 땅이 흔들리는 폭발음이 더 들렸다. 미군은 자기들이 폭발물을 발견해 터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2시께부터 사고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마을에서 시체 한 구 한 구가 골목을 따라 나오더니 장례식장인 모스크로 들어갔다. 관 하나에 수백 명씩 따라 다녔다. 모스크 주변을 가득 메운 군중은 한결같이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무고한 라마디 주민이 죽었다’는 미군폭격설을 철석처럼 믿고 있었다.

시위대에 밀려 후퇴한 미군 전차와 지프

이 날 알 자지라 등 아랍 방송은 오후 1시를 전후해 사담 후세인 체포 속보를 날렸다. 그러나 기자는 취재 와중이어서 현장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체포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3시께, 폭발 지점에서 300m 가량 떨어진 모스크 쪽에서 갑자기 거대한 시위 인파가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이라크 국기와 관을 여러 개 앞세운 시위대는 도로를 점거하고 미군이 지키고 있는 폭발 현장으로 행진했다. 미군은 시위대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병사들은 브래들리 전차와 지프를 타고 기지 쪽으로 물러났고, 기세가 등등해진 시위대는 브래들리 전차를 쫓아 달렸다.이 와중에 기자와 동행하며 취재하던 일본 프리랜서 기자 요주루 오시마라 씨가 시위대 중 한명에게 밀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카메라가 부서졌고, 렌즈가 깨졌다. 최근 연이은 동양인에 대한 테러가 떠올랐다. 그러나 주변의 또 다른 라마디 시민들은 오시마라 기자를 일으켜 세우며 사과했다.

 
미군 브래들리 전차를 향해 돌진하던 시위대 중 한 명이 어느새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미군 총격 때문은 아닌 듯했다. 그는 급히 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미군 브래들리 전차는 기지 문 앞에 와서야 재정렬하고 대오를 갖추었다. 만약 시민들이 기지 안으로 진입하려고 한다면 어떤 비극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이 일단 숨을 멈추고 기지 맞은편 언덕으로 피하면서 급박했던 상황은 진정되었다.

바그다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담 후세인 체포 뉴스가 연신 흘러나왔다. 운전사는 환호했다. 이 날 라마디 시민들은 후세인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시위를 벌인 것일까? 구호에 사담 후세인 이름은 없었다. 주변의 시민들도 후세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후세인 체포 이후에도 미군이 평화롭지 않다는 점은 명백해 보였다.

그런 낌새는 후세인 체포 전 날부터 감지되었다.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기 몇 시간 전 기자는 티크리트에 있었다. 12월13일(토요일) 오후 1시께 기자가 살라하딘 주지사 주부리를 만나려고 티크리트 정부 청사를 방문했다. 주지사실 관계자는 “이렇게 위험한 곳에 직접 찾아왔으니 만나는 것이 예의이겠으나, 주지사님은 급박한 사정이 생겨 미군행정청과 미군의 아주 높은 인사를 만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면담이 힘들다. 아주 중요한 회의여서 여러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그다드 시민 열에 일곱은 후세인 생포 환영

기자 일행은 주지사가 그 ‘중요한 회의’를 하는 동안 티크리트 북쪽 베이지에 다녀왔다. 3시30분께 돌아오니 비서는 “주지사가 행정청과 미군 고위 인사들과 함께 어딘가로 떠났다”라고 말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기자는 부주지사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인터뷰에 응한 살라하딘 부주지사는 “저항 세력은 곧 궤멸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잡고 있다. 특히 높은 놈들을 잡고 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92쪽 인터뷰 기사 참조). 그와 인터뷰가 끝난 후 후세인은 티크리트에서 15km 떨어진 아드완에서 오후 8시30분에 잡혔다.

후세인 체포 소식이 발표된 직후 바그다드는 전반적으로 축제 분위기였다. 기자가 이 날 인터뷰한 바그다드 시민 열에 일곱은 후세인이 체포된 것을 환영했다.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리고 있었는데, 가벼운 M16 소총 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카르니시코프 총소리였다. 후세인 체포를 축하하는 총성이었다. 카데라 거리에서 총을 쏘는 한 남자를 만났다. 바짐 아브라힘(21·사설 경호원)은 “방금 뉴스를 들었다. 오늘은 축제, 사담 시절은 악몽이었다.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는 미군이 진주한 4월9일을 기념일로 정했지만, 내 생각에는 12월14일을 국경일로 해야 마땅하다”라고 주장하며
인터뷰 도중에도 AK47 총을 쏘아댔다. 시마 식(26)이라는 여성은 “너무 기쁘다. 사담은 사람을 많이 죽이고, 가두고, 나라를 망쳤다. 리더가 없으니 테러는 잠잠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장차 미군의 역할에 대해서 묻자 “이라크가 안정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미군이 필요하다. 지금 갑자기 미군이 나가버리면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보통의 이라크 여성과 달리 머리칼을 내놓고 다니는 신여성이다. 옆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미국은 후세인을 이라크 재판정에 넘겨야 한다. 후세인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따져 묻고 싶다”라고 말했다.

후세인이 저항 없이 미군에게 잡힌 데 대한 주민들의 실망도 역력했다. 전직 엔지니어인 모하메드 탄피크 씨(32)는 “그는 자살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영웅이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를 추앙했을 것이다. 지금 모습은 보기 추하다”라고 말했다.

“후세인은 안 잡혔다. 부시의 조작이다”

후세인 체포 소식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택시 운전사 알리 하센 씨(59)는 “후세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후세인과 닮은 사람을 내세운 것이다. 부시가 선거 표를 얻기 위해 조작한 거다”라고 주장했다. 왜 미군을 믿지 않느냐고 묻자 “미국은 그동안 거짓말만 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 전기도 없고, 안전도 없다”라고 말했다. 바그다드 대학 학생 아우스 하심 씨(29)도 “진짜 사담이 잡혔나? 나는 믿지 않는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중립적인 사람도 있었다. 아티 알 바케트 씨(32)는 “1시쯤에 라디오로 후세인 체포 소식을 들었다. 그가 체포된 것을 환영한다. 따라서 이제 미국은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목적을 이루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상인 야슬러 아드난 아민 씨(26)는 “후세인은 후세인이고, 이라크는 이라크다. 뉴스 듣고 별 감흥 없었다. 사담의 체포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저항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질 것이다. 미군은 계속 남으려고 할 테지만, 저항 세력 때문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미군의 선택은 두 가지다. 여기를 완전히 떠나든가, 아니면 자유·전기·기름 등 우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바그다드 시민들과 알 사둔 거리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알파나르호텔로 돌아오는데 미군이 길을 막았다. 저녁 8시20분에 여기서 대형 폭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랍 지역 뉴스는 저항 세력이 트럭에 기름통 3개를 싣고 터뜨렸으나 사상자는 없었다고 보도했다(AFP통신은 단순한 화재라고 전했다). 후세인이 체포된 뒤 밤새도록 바그다드 곳곳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여전히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감히 밤거리를 걷는 시민은 없었다. 다음날인 15일, 바그다드 서쪽 경찰청 건물 옆에서 차량 폭탄이 터져 적어도 4명이 다쳤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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