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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시론]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의 목소리

페미니즘도 하나의 이론이자 이데올로기로서 다양한 패러다임 공존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13(Wed) 17:30:00 | 14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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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 그녀의 본명은 글로리아 진 왓킨스로, 벨 훅스는 필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필명을 반드시 소문자 bell hooks로 쓴다. 언젠가 읽은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굳이 소문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이름을 대문자로 쓰는 것 자체가 주류집단의 오만함(arrogant)을 상징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녀의 필명에 담겨진 이야기가 흥미롭다. 어린 시절 그녀는 할머니로부터 흑인 여성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던 동화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한다. 동화 속 여주인공의 꿈은 목에 커다란 벨(방울?)을 달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었는데, 늘 착한 마음으로 항상 착하게 살았기에 결국 복을 받아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였다 한다. 그녀는 동화를 들을 때마다 백인 사회에서 흑인 여성으로 착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되새기던 기억을 살려 자신의 필명에 벨을 넣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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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그녀 자신은 동화 속 여주인공과는 정반대로 동네에서 으뜸가는 개구쟁이로 주변 친구들을 괴롭히는 남자 아이들을 때려주는 말괄량이였다 한다. 할머니는 그녀가 남자 아이들을 혼내주고 들어온 날이면 그녀의 목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선 집 뒤편 헛간으로 데려가셨다. 그러곤 헛간 문에 달린 커다란 대못에 그녀를 걸어두곤 하셨다는 것이다. “여자애가 그렇게 사나우면 어디다 쓸꼬” 끌끌 혀를 차시면서. 손녀의 앞날을 걱정해 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을 기억하고 싶어 붙인 이름이 훅스라는 것이다. 

 

그녀가 1984년 발표한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는 주변(margin)을 대변하는 흑인 여성의 경험과 시선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 또한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center)으로 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논리적으로 설파했다. 뒤를 이어 페미니즘이 간과해선 안 될 과제로 남성들을 설득하고 함께 갈 수 있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함을 제안했다.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모두가 너나없이 피해자이기에, 남성=가해자, 여성=피해자로 이분화하거나 적과 아군으로 범주화하는 전략의 위험성을 일찍이 간파했던 셈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다시’ 페미니즘이 화두로 부상 중이다. ‘다시’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1977년 한국에 최초의 여성학 강좌가 개설된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가에 페미니즘 열기가 뜨거웠던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인 덕분이다. 조금 과장해서 당시는 페미니즘 깃발만 꽂아도 관중이 물밀 듯이 밀려왔었다 했는데, 언제부턴가 ‘여성학의 여 자만 들어도 머리에 쥐 난다’는 20대 여성들의 보수화에 선배 여성들이 당혹스러워했던 기억도 있다. 

 

분명한 건 페미니즘도 하나의 이론이자 이데올로기로서 온건한 목소리부터 과격한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패러다임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인 여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제3세계 여성의 목소리도 있고, 젠더 이슈보다 인종 차별이 보다 근본적인 억압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흑인 페미니즘도 있고, 인디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운동에 동참하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도 있다. 한국 사회에도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적극 공감하는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페이스북 사옥 앞에서 상의를 벗은 채 성차별적 검열에 격렬하게 항의 시위를 한 여성들도 있고, ‘탈코르셋 운동’에 다채로운 방식으로 동참하는 여성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토록 다양한 목소리를 포용하면서 진정성을 갖추어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적어도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적 비난과 근거 없는 비판을 앞세우며 분노와 혐오감을 표출하는 건 사절이다. 거꾸로 자신의 페미니즘만을 절대 진리로 인정한 채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 또한 그 자체로 비(非)페미니즘적이란 사실 또한 마음에 새길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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