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골잡이가 키운 괴물 공격수, 말컹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15 09:10
  • 호수 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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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리그 정복한 경남FC 말컹, 1부 리그서도 개막전 해트트릭

 

봄과 함께 2018년 한국 프로축구가 개막했다. 기존의 K리그 클래식(1부)과 K리그 챌린지(2부)의 명칭을 K리그1과 K리그2로 바꾼 프로축구는 부흥을 꿈꾼다. 프로야구, 유럽축구와의 경쟁에서 지속적으로 밀리며 지난해에만 전년 대비 관중 수가 30만 명이나 감소했다. 흥행은 수년째 감소 추세다.

 

어려울 때일수록 새로운 스타가 절실하다. 아직도 K리그 최고 스타는 올해 마흔인 이동국이다. 이동국이 은퇴하면 K리그 관련 기사가 3분의 1은 줄어들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농담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개막전부터 호재가 터졌다. 올해로 K리그 2년 차를 맞는 외국인 선수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경남FC의 브라질 스트라이커 말컹(본명: 마르쿠스 비니시우스 아마라우 아우베스)이다.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며 화제가 됐다. 경기 투입 2분 만에 결승골을 넣은 이동국도 해내지 못한 쾌거(?)다.

 

말컹은 상주 상무와의 개막전에서 해트트릭(3골)을 기록했다. 전반 10분 문전 혼전 상황에서 오른발 슛으로 선제골을 성공시킨 그는 후반 6분과 16분에도 연속골을 넣었다. 득점 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그룹 트와이스의 히트곡인 《TT》의 주요 안무를 따라 하는 골 세리머니로 눈길을 끌었다. K리그 역사상 시즌 개막전(정규리그 기준)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축구사에 기록됐다. 이날 경기 후반 33분, 경고 2회로 퇴장당했지만 팬들은 오히려 ‘조기 퇴근’이라는 표현을 붙였다. 경기 후 그의 활약을 다룬 기사가 쏟아졌다. 완벽한 스타 탄생이었다.

 

3월4일 경남 창원시 성산구 창원축구센터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K리그1’ 경남FC와 상주 상무의 경기에서 경남FC 말컹이 두 번째 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브라질에서 온 원석, K리그 보석으로

 

말컹은 지난 시즌 경남과 함께 2부 리그에서 뛰었다. 1994년생인 그는 가능성 하나만 믿고 영입된 선수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것은 2011년, 그가 만 17세였던 때다. 뛰어난 선수들이 늦어도 10세 전후, 이르면 5~6세부터 축구 교육을 받는 것을 감안하면 늦어도 한참 늦었다. 농구 코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농구선수를 꿈꿨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미국대학농구(NCAA)로 진출해 미국프로농구(NBA) 무대를 밟길 기대했다.

 

하지만 말컹의 운명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뒤바뀌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한 말컹은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어린 선수에게 월급을 주는 축구로 방향을 틀었다. 브라질 4부 리그 소속인 이투아누FC에 입단한 그는 월급 10만원에 계약을 맺었다. 받은 월급은 모두 어머니에게 주는 효자였다.

 

하부 리그를 맴돌던 말컹은 2016년 말 K리그 진출 제안을 받는다. 경남의 김종부 감독이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를 위해 직접 브라질을 찾았다가 말컹의 엄청난 운동 능력을 본 것이다. 신장이 큰데도 불구하고 농구선수 출신답게 순발력과 속도가 뛰어났다. 브라질에서 말컹은 중앙이 아닌 측면에서 뛰는 공격수였다.

 

당시 2부 리그에서 약 20억원으로 선수단 전체 연봉을 꾸려야 했던 경남과 김종부 감독도 몸값이 싸고 잠재력 높은 선수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한 채 한국으로 왔지만 말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는 2개월이면 충분했다. 개막전에서 헤딩 결승골로 승리를 이끈 그는 15경기에서 11골을 넣으며 득점 선두로 치고 나갔다. 다크호스 정도로 분류됐던 경남은 우승 후보였던 부산, 아산을 제치며 리그 1위로 독주했다. 말컹은 무릎 부상으로 마지막 3경기를 뛰지 못했음에도 32경기에서 22골을 넣었고, 경남은 조기에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을 확정 지었다.

 

과거 아드리아노(현 전북), 조나탄(전 수원, 현 톈진 테다) 등 2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공격수들이 1부 리그에서도 맹활약했던 전례 때문에 말컹을 향한 국내외 팀들의 관심도 커졌다. 임대 신분이었기에 경남으로선 이적료 한 푼 받지 못하고 뺏길 수도 있었다. 몇몇 중국팀이 거액의 이적료와 10억원이 넘는 연봉을 제시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하지만 선수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해외 진출의 기회를 준 경남과의 의리를 지키는 걸 택했다. 경남으로 완전히 이적하며 2억원(추정)가량의 연봉을 받는 데 그쳤지만 말컹은 “어머니를 모시는 데는 충분한 돈이다. 함께한 동료, 팀과 함께 1부 리그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말컹 키운 ‘비운의 공격수’ 김종부 감독

 

말컹의 국내 에이전트인 추즈스포츠의 신지호 대표는 “돈이나 야망보다는 아직 축구를 더 순수하게 즐기는 선수”라고 평했다. 골을 넣으면 최신 축구화, 그리고 말컹의 우상인 NBA 스타 스테판 커리의 농구화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때마다 말컹은 목표를 달성했다.

 

동계훈련을 앞두고는 말컹이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개막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면 200만원 상당의 맥북 프로 노트북을 사달라고 한 것이다. 신 대표는 “지난 시즌 말컹이 우승, 승격, 득점왕을 달성했지만 딱 하나 못한 게 해트트릭이었다. 개막전부터 그게 되겠나 싶어 승낙했다”고 말했다. 결국 개막전 이틀 뒤 신 대표는 맥북 프로를 사 들고 경남 클럽하우스로 가야 했다.

 

무명의 브라질 공격수가 거둔 대성공 뒤에는 김종부 감독이 있다. 평소 말컹이 ‘한국의 아버지’라고 표현할 정도다. 브라질에서 원석을 발굴한 김 감독은 처음엔 성공을 반신반의했다. 운동 능력은 탁월하지만 축구를 시작한 지 6년이 채 되지 않아 골을 넣기 위한 효과적인 움직임과 전술적 플레이가 미숙했다. 김 감독은 동계훈련 내내 스트라이커가 갖춰야 할 움직임 등을 가르쳤다.

 

김 감독의 ‘세공’ 속에 말컹은 ‘보석’이 됐다. 말컹을 세상에 내놓으며 김 감독의 가슴속에 있던 상처도 어느 정도 씻겼다. 한국이 원조 4강 신화를 쓴 1983년 세계청소년선수권(현 U-20 월드컵)에서 박종환호의 간판 골잡이로 활약했던 김 감독은 대회 이후 스카우트 파동에 휩싸였다. 프로팀 간의 분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했다.

 

이후 학원 축구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한 김 감독은 3부 리그 격인 K3의 화성FC에서 우승을 거뒀고 2016년 경남 감독으로 부임해 2년 차에 2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다시 축구 인생의 봄날을 맞았다. 말컹은 감독 김종부 앞에 아로새겨진 비운을 떼게 해 준 지도자 인생의 걸작인 셈이다. 완전 이적 과정에서 사비를 털어서라도 말컹을 지키겠다는 의욕을 보인 김 감독에게 선수도 신뢰와 의리로 보답했다.

 

김 감독과 말컹은 더 큰 동행을 꿈꾼다. 말컹은 “유럽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K리그1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뒤 인정받아 더 큰 무대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김종부 감독은 “아직 미숙한 점이 있지만 성장세는 정말 놀랍다”며 자신이 키운 골잡이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두 사람의 올해 공통된 목표는 경남의 상위 스플릿(6강) 진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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