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유럽 정복의 원동력 된 커피
  • 구대회 커피테이너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21 11:32
  • 호수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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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회의 커피유감] 남미 독립운동의 거대한 열망도 커피가 만들어

 

“나에게 불가능은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군인이자 뛰어난 지도자로 이름을 떨친 나폴레옹의 명언이다. 그런 그조차도 결국 웰링턴이 이끈 영국·프로이센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남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영국 해군이 그를 세인트헬레나에 유배한 이유는 가장 가까운 육지가 1900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곳에 커피가 재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시민들이 더위를 피해 앉아서 쉬고 있다. © 사진=AP연합

 

커피로 유배지서 외로움 달랜 나폴레옹

 

커피의 카페인이 인체를 각성시키고 운동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믿었던 나폴레옹은 근대 최초로 커피를 군대 보급품으로 채택·지급했다. 전장의 군인들은 전투가 없을 때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커피 잔 속에 비친 전장의 흙먼지를 뒤집어쓴 자신의 얼굴에서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 그리고 어머니를 회상했을 것이다. 문호 발자크가 커피의 힘에 의지해 전쟁을 하듯 글을 썼던 것처럼, 군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커피 한 잔의 위로를 받으며 적진으로 진격했을 것이다. 마치 나폴레옹의 커피 예찬인 ‘내게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은 진한 커피, 아주 진한 커피다. 커피는 내게 온기를 준다’를 성경 구절처럼 받들면서 말이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커피뿐이었다”고 고백했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생산되는 버번 아라비카 품종 커피는 아주 비싸게 거래된다. 1815년 엘바 섬으로 유배된 후 1년 만에 다시 황제로 복귀한 경험이 있었던 그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후에도 언젠가는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그의 명언처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엘바 섬과는 달랐고, 국내 정세 또한 과거와 달랐다. 더욱이 영국 총독 허드슨 로우는 나폴레옹의 거처인 롱우드 주변에 보초병을 여럿 붙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을 뿐 아니라, 생활비를 깎고 산책 범위를 줄이는 등 그를 혹독하게 대했다. 섬 밖은 망망대해고 작은 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커피밖에 없었다. 폐위된 황제가 섬에 유폐되어 할 수 있었던 것은 커피의 힘에 의지해 회상록을 남기는 것뿐이었다.

 

한때 나폴레옹이 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않았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커피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3시간 수면설은 그의 비서 비리센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건강에 신경을 썼기에 하루 8시간의 수면을 취했다고 한다.

 

식민지 아메리카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는 1775년 3월23일,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세인트존 교회에서 열린 버지니아식민협의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커피에 관해서도 “내게 커피를 주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좀 과장된 듯해도 그가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예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자유에 대한 사상은 어디까지나 백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1만 에이커(1223만 평)에 달하는 대농장 소유주였으며, 75명의 흑인 노예를 부렸다. 또한 백인 지배에 저항하는 북미 원주민인 체로키족 등에 대해서도 가혹한 탄압을 했다. 커피가 사람의 인성까지 바꾸지는 못한 것 같다.

 

16세기 초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은 16세기 말까지 체계적이고 무자비한 통치로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중·하위 관직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세력을 키워나간 중·남미 태생의 스페인인 ‘크리오요’가 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은 비록 스페인 국적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라틴아메리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상위 관직의 대부분을 독점해 온 스페인 태생의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결국 식민지 토착 엘리트 크리오요의 성장은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권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8세기 스페인 부르몽 왕조의 식민지 통치 재무장 정책은 크리오요의 강한 반발과 저항을 초래한다. 결국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취한 조치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필요성을 자극한 것이다. 미국 독립(1776년)·프랑스혁명(1789년) 등의 영향으로 라틴아메리카 독립 필요성에 대한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한 크리오요는 단계적으로 독립을 향한 저항운동을 펼쳐 나간다.

1807년 나폴레옹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침입은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스페인 왕조는 분열되어 왕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포르투갈 왕 후안 6세는 브라질로 도피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결국 1811년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멕시코·아르헨티나·콜롬비아·에콰도르 등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가 순차적으로 독립했다.

 

근대 최초로 커피를 군 보급품으로 지급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 © 사진=연합뉴스


 

사회 문제의식 표출 장소를 카페가 담당

 

흥미로운 점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이면에도 커피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중·남미 커피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작은 섬 마르티니크에서 시작되었다. 1720년 당시 프랑스군 연대장이었던 드 클리외가 본국으로부터 가져온 커피 묘목을 마르티니크 섬에 이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18~19세기 중남미에 커피를 전파한 것이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불만이 표출된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일 곳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카페가 담당했다. 여론이 형성되는 곳, 그 중심에 카페가 있었다. 카페에서는 각성의 음료인 커피가 제공됐기에 와인·럼 등과 달리 사람들이 깨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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