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피디의 방송 수첩] “더 주신다고 해놓고 이게 뭡니까”
  • 박진석│KBS PD (.)
  • 승인 2015.09.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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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료 놓고 매니저와 벌이는 벼랑 끝 협상

 

 

온 나라 사람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던 남북 군사회담. 외교 관계든 사람 대 사람의 관계든, 중요한 건 무엇보다 대화다. 시작이 어떠했든, 결론의 모양새가 어떻게 났든, 일단 대화가 이루어졌고, 무엇보다 파토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번 대화를 잘 마쳤으니 어떠한 형식이든 다음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필자는 이 시점에서 문득, 정말로 엉뚱하게도 2007년 필자가 나누었던 어떤 ‘불편한 대화들’을 떠올렸다.

당시 필자는 KBS 아침드라마 <TV소설> 한 시리즈의 조연출이었다. 해마다 그리고 PD들의 인적 구성에 따라 조연출의 역할은 조금씩 달라지는데, 당시 매일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은 출연진의 매니저들과 출연 계약 건으로 대화하는 것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업무 시간 동안 늘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는 매니저의 전화 때문에 나중에는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계약 건에 대한 전화인가 싶어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차라리 오후 6시 이후 공식 업무 시간이 끝난 다음에 필자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예고편 편집이나 드라마 후반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돌아오면 안심이 될 정도였다.

ⓒ 시사저널 김세중

오르지 않은 제작비, “올려주마” 말한 감독

사단의 원인은 한마디로 연출자의 무모한(?) 약속이다. 연출자는 ‘이번에 출연하면 전작 출연료에 비해 확 올려주마’라고 꽤 많은 배우에게 공수표를 날려 출연 약속을 받아낸 터였다.

그런데 제작비 현실은 달랐다. 매년 물가상승률을 따라가기는커녕 동결만 되어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해 연출자와 달리 제작을 총괄하는 프로듀서 선배는 꼼꼼한 원칙주의자였다. 전체 제작비 중에서 출연료로 지급할 돈은 한정돼 있어 대다수 출연자가 자신이 출연한 전작보다 확 인상된 금액으로 계약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연출자는 연출자대로 ‘감독인 내가 말해둔 게 있는데…. 어떻게 알아서 잘해봐’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대책 없음으로 똘똘 뭉친 ‘감독님’이셨고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연출자 덕에(심지어 그는 프로듀서보다 선배인 고참 연출자였다) 프로듀서가 내린 해결책은 ‘조연출인 나를 망치 삼고 자기는 모루 역할을 자처하며 출연자들의 장밋빛 꿈을 깨뜨린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조연출인 필자가 했던 역할은 분명했다. “감독님이 뭐라 말하셨든 출연료 인상은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녹음기’였고, 매니저들은 “분명히 감독님이 약속하신 걸 믿고 들어왔는데 어찌 저희한테 이러실 수 있나요”라고 따졌다. 아직 소심한 새내기급 PD인 상황에서 그들의 말 또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으니, 딱 잘라 말하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혼자 끙끙 앓는 날이 이어졌다.

이러는 와중에 방송은 시작됐고 그 시점까지도 출연료 동결을 받아들인 일부 배우 말고는 제대로 출연 계약을 한 경우가 드물 지경이었다. 그즈음이 되니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조연출로서 무능력해 벌어진 일인 것만 같았고 마치 필자 개인이 거액의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과 비슷한 심리 상태에 빠져들었다.

‘시청자와의 약속’ 명제 앞에서는 모두가 을

매니저들(과 그들이 대변하는 배우들) 입장에서는 ‘출연료 인상’이라는 연출자(‘감독님’) 말만 믿고 들어왔다. 그런데 어물어물 촬영을 하고 스튜디오 녹화를 하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막상 실무 단계에 이르러 유일한 대화 창구인 조연출에게 가니 그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이다. 못 올려준다”고 말한 셈인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라? 방송은 시작됐다. 이런 상황까지 오면 악에 받칠 만하다. 물론 믿고 싶은 말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은 사실이지만, 욕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누가 거기에서 자유로우랴.

겉모양새만 대화 형식이었지 대화랄 게 없었던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PD와 매니저가 자기 입장만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어찌 대화라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매번 고역이었던 것이다. 상대인 매니저들 역시 받아들이기엔 연출자로 대표되는 ‘제작진’이 먼저 질렀다는 ‘명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을 배우에게 가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양자가 얻을 바를 얻지 못해 괴롭기만 하고 그렇다고 대화 당사자들이 용단을 내릴 권한은 없는 이런 나날이 이어졌다.

타개할 상황이 안 보이면 그냥 놓아버릴 수도 있는 법이다. 매니저들 중에서도 차라리 ‘이러면 촬영 못한다’는 말을 내뱉고 싶은 사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에이, 그럼 차라리 촬영 나오지 말든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협상에서든 파토를 내지 않으려면 어느 선 이상을 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방송에서는 그 선이란 게 ‘시청자와의 약속이니까 방송은 나가야 한다’는 명제다. 서글프고 순박하기까지 한 ‘광대의 숙명’이다. 연출자나 스태프나 배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입지와 처지에 따라 온도차는 있지만 이 명제 아래서는 대부분 ‘을’이다. 어쩌면 조연출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그 선배들의 속셈에는 그런 광대의 순박함을 이용하고자 한 면모가 아주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상황을 타개한 건 어리바리한 막내 노릇 끝에 찾은 궁여지책이었다. 제작비 세부 사항을 전부 대차대조해보고 전 출연자가 기대할 수 있는 총 인상 금액을 뽑아내서 프로듀서 선배와 매니저 양쪽을 다 설득하는 것이었다. 사실 제작비 관리가 업무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조연출로선 진작에 했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경험 부족으로 깨닫지 못했던 탓이다. 매니저들에게도 무언가 전향적 대안을 가져오지 않으면 그나마 소소한 인상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전달했다. 본디 목표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실리는 챙기자는 제스처였다. 대화를 이끌어갈 권한이 없는 줄로만 알고 시작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음을 뒤늦게 발견해서 잘 마무리한 케이스랄까.

이 일을 하다 보면 밉살맞은 상대와 대화를 해야만 할 때가 있다. 감정만으로 따지자면 어쩐지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갑갑할 때도 있다. 대화라는 것은 애초 대화 없이는 합의가 안 될 각자의 입장을 확인하고, 그 격차를 좁혀가기 위함이다. 결국 당사자들이 최소한의 실리를 얻으면서 공동의 이익을 달성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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