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간 돋보기 하나 못 팔기도
  • 윤영무│MBC아카데미 이사 ()
  • 승인 2015.04.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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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평짜리 가게에서 거상으로 성장한 ‘라인안경’ 조영옥 사장

이왕이면 한강북로로 가자. 뒷자리 상석에 앉은 분에게 오른쪽으로 비치는 한강 경치를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 “한강을 바라보며 옛날 추억을 떠올려보시죠” 하는 거지. 강변의 추억이 떠올라 심경의 변화가 생기면 “팔당까지 가자!”고 하실 수도 있잖아. “그럼 우린 그분에게 점수를 따서, 인터뷰가 잘될 수 있을 거야”라고 기사에게 일러두고 필자는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있는 ‘라인안경’의 조영옥 사장을 만나러 갔다. 1평짜리 안경점을 대형 안경 전문 쇼핑몰로 키운 여장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필자가 고향 선배에게 부탁해 소개받은 분이다. 초면인 필자는 조 사장을 만나러 그곳에 갔는데 블로그를 찾아보니, 지하철 건대역 5번 출구 근처에 있는 5층 건물이었다. 모든 층을 안경 매장과 휴게실, 사무실로 쓰는데 1층에는 국내의 모든 브랜드와 아큐브·바슈롬·시바비전·쿠퍼비젼·클라렌 등 교체용 렌즈, 그리고 오클리 정품이 있고, 2층에는 전 세계의 하우스 브랜드와 명품 브랜드, 덴마크의 하우스 브랜드인 린드버그 전문 코너, 슈퍼 선글라스 등 세계 각지의 브랜드를 모아놓았다. 3층은 시력 검사실과 각종 검안 기기가 갖춰진 안과 과학 실험실이었다. 

‘라인안경’ 조영옥 사장 ⓒ 시사저널 박은숙
조 사장과 수인사를 나누고 보니 필자보다 3년 연상이었다. 조 사장은 60대 초반의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으며 단아했다. ‘저렇게 가냘파 보이는 얼굴인데 어떻게 안경 거상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필자는 부모님 덕에 좋은 시력을 갖고 태어나서 안경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조 사장의 안내로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경을 보고 나니, 새삼 우리 삶에서 안경이 차지하는 부분이 매우 큰 것임을 깨닫게 됐다. 하기야 안경과 거의 관계없는 필자도 주택 전시회에 갔을 때 구입한 2만원짜리 돋보기, 동네 안경 전문점에서 산 자전거용 고글, 공항 면세점 선글라스(하나는 잃어버리고 두 번째 구입한 것), 그리고 아들 녀석이 필자에게 강매한 중국산 패션 선글라스 등 4개의 안경을 갖고 있으니, 지구상에는 적어도 67억개 이상의 안경이 인류와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신용 쌓았더니 사람들이 돈 빌려줘”

“여기 있는 제품을 모두 합치면 얼마쯤 나가요?”라고 조 사장에게 물었다. 조 사장은 질문이 황당했는지 묵언수행하듯 마지못해 말했다. “계산이 당장 불가능해요. 대충 몇 백억 원쯤 되겠지요.”  

 자동차 뒷문을 열어주며 “앉으시라”고 권하고, 팔당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창밖으로 봄기운이 퍼지기 시작한 한강이 보였다. “저기 보세요. 강물이 유유히 흘러요. 강변의 추억이 있으신가요?” 조 사장은 달빛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잠시 미소 짓다가 말했다.

“장사는 강물 같아요. 실개천이 모여 시내가 되고, 시내가 하천이 되고 하천이 강이 돼 바다로 흘러가요.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시작해 이룬 게 많았으니, 장사란 열심히 하다 보면 흐름을 타는 것 같아요. 설레는 마음으로 고객을 기다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운을 개척해요. 설레는 마음으로 행복을 만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고객과 더불어 살아가지요.”

강변으로 차를 달려 인터뷰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예상이 적중한 듯했다. 조 사장은 강물을 역류해 40여 년 전, 21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전의 기술고등학교에서 양재를 배운 후 서울로 올라와 집안 오빠의 양장점에 다니며 디자인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림이 젬병이라 문제였다. 조 사장은 친구와 남산에 놀러 갔다가 안경점을 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그림이 따라주지 않아 자신의 주특기를 버리고 남편과 같이 안경점을 시작한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 아래윗집에서 돈을 꿔야 했는데 3~4부의 비싼 이자였어요. 저는 비싸서 못 사먹는 과일을 사서 선물하고 이자도 드렸지요. 한 번도 약속 날짜를 어긴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남의 집에 세 들어서는 돈이 벌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약속했어요. 앞으로 내 점포가 아니면 장사를 안 한다고요. 점포 위치도 중요했고요. 무엇보다 신용이었습니다. 신용을 쌓아두었더니 은행이나 다른 사람들이 돈을 빌려줘 내 점포를 갖게 해준 것이죠.”

처음 장사를 시작한 곳은 목이 안 좋았다. 중간에 쑥 들어간 곳이어서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다. 거의 두 달 동안 돋보기 하나 팔지 못해 50원 하는 국수조차 사먹지 못했다(이때 조 사장의 눈시울이 촉촉해 지려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청계천5가에 1평짜리 공간이 나왔다. 중간에 쇠기둥이 박혀 있어, 목은 좋은 곳인데 죽어 있는 점포였다. 쇠기둥을 제거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걸 사면 되겠다. 조 사장은 아래윗집으로 뛰어다니며 돈을 빌렸다. 그동안 쌓은 신용이 힘이 됐다.

“세상에서 돈 버는 게 제일 재밌어”

“장사가 정말 잘됐어요. 휴가철이 시작되면 더 잘됐고요. 평소에도 매출이 꾸준했거든요.” 장사가 잘되자 더 큰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마침 1978~79년 종로5가 지하상가에 12평짜리 점포가 났다. 당시 12평 점포는 큰 평수였는데 권리금 4000만원을 포함해 1억3000만원이었다. 조 사장은 매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계천에서 돈놀이를 하는 남편 친구를 찾아갔다. 1년만 봐달라고 통사정을 한 뒤 자신의 신용을 바탕으로 2억원을 빌렸다. 조 사장은 점포를 사고 물건을 들여놓았다.   

“1985년인가요? 덤핑을 치는 곳들이 생겨났어요. 우리는 반대로 했어요. 1988년부터 정찰제를 실시해 5~6년간 호황을 누렸지요.” 안경 거상 조 사장도 안경 장사가 미치도록 싫을 때가 있었다.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끔찍했다. 옆집 옷 가게의 매출은 자기 점포의 10배쯤 됐다. 안경 장사의 길을 벗어나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지만 재고가 쌓여 6개월 만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조 사장을 안경 장사의 길로 다시 들어서게 한 것은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어본 시아버지였다.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하셨지요. 남의 돈이 크게 보이는 법이니 이것저것 하지 마라, 지금 일을 천직이려니 하고 꾸준하게 하라고 하셨지요.” 처음부터 큰 것을 바라지 않고, 신용을 쌓고 내 것을 하나씩 하나씩 이뤄가는 성취감, 오늘날 조 사장을 안경 거상으로 만든 동인이었다.  

“돈 버는 거요? 세상에 돈 버는 일이 제일 재미있지요. ‘돈을 꼭 벌겠다’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최고로 열심히 사는 것이죠.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세워 실천하다 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어요. 돈이 따라오니 더 열심히 하게 되고요. 돈은 중요하지요. 버는 것보다 잘 써야 되는 것이거든요.”

조 사장에게 돈을 어떻게 잘 쓰고 계시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만뒀다. 모든 것을 이룬 자의 여유로움이 얼굴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색하거나 자기만을 위해서 돈을 벌어 쓰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사람에겐 없는 아우라 같은 것이었다. 안경이 없었다면 인류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살아가야 될 것이다. 지구 밖으로 수백억 광년이 떨어진 우주의 질서를 보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가 볼 수 없는 바이러스와 세균을 찾아 박멸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조 사장이 안경 장사를 천직으로 받아들여 반세기 가까이 이어온 것은 안경이, 렌즈가 인간의 눈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넘어서도록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행복한 조 사장은 친정 조카, 남동생 등 20여 명을 회사로 불러 안경 가족을 이루고 있는지 모른다. 행복하지 않다면 그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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