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의 ‘수첩 역습’ 청와대 안방 겨누다
  • 이승욱·조해수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01.1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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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들 다 베어버려야”…정점 치닫는 권력투쟁

발단은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1월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언론사의 카메라에 찍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 메모 사진이 청와대와 새누리당 등 여권 내부를 뒤흔들었다. ‘김 대표 수첩’ 사진에는 ‘문건 파동 배후는 K, 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메모가 담겨 있었다. 지난해 12월18일 한 술자리에서 청와대 행정관이 ‘정윤회 문건 파동’의 배후로 김무성 대표와 여당 중진 의원이자 유력한 차기 원내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유승민 의원을 지목했다는, 간결하지만 충격적인 메모였다.

여권은 다시 발칵 뒤집혔다. 비선권력 개입 의혹 등으로 몸살을 앓은 청와대는 새해 들어서도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항명 파동에 이어, 생각지도 못했던 수첩 파문으로 또 논란에 휩싸였다. 봉합되는 듯했던 당·청 간 갈등 기류는 되돌리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청와대가 김 대표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 이번 수첩 파문을 계기로 분명해졌고, 김 대표 또한 “청와대 조무래기들” 운운하며 격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015년 국회 첫 본회의가 열린 1월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자신의 수첩을 바라보고 있다. ⓒ 뉴스웨이 제공
“세 비서관 관련 작은 비리라도 터지면…”

당 대표 취임 후 김무성 대표는 청와대를 향해 한껏 몸을 낮췄다. 전당대회에서 “대통령에 할 말은 하겠다”며 ‘비박(근혜)’ 진영의 지지를 등에 업고 ‘친박(근혜)’ 후보 서청원 최고위원을 꺾고 당선됐지만, 취임 이후 행보는 신중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단 때를 기다리겠다는 김 대표의 노회한 전략일 뿐, 언젠가는 청와대를 향해 칼을 들이댈 것이라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한마디로 청와대는 김 대표를 결코 믿지 않는다는 인상이 역력했다. 힘으로 누르려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지난해 10월 김 대표의 ‘상하이발 개헌론’ 발언 이후, 본격적으로 김무성 체제를 자극하면서 세를 불리는 친박계의 긴박한 움직임이 엿보였다. 마치 김 대표를 에워싸는 듯한 청와대와 친박의 움직임은 언제라도 김 대표를 향해 십자포화를 쏟아부을 기세다. 그래서 친박의 ‘김 대표 체제 흔들기’가 본격화됐다는 분석이 정치권에서 나온다.

하지만 김 대표가 또박또박 적어놓은 수첩 글귀가 공개되면서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됐다. ‘문건 파동 배후설’의 당사자로 알려진 음종환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은 수첩 내용이 공개된 지 이틀 만에 사표를 냈고, 청와대는 곧바로 그를 면직 처리했다. 측근 인사들의 논란에 대해 그동안 ‘선 진상 규명, 후 인사 조치’라는 입장을 고수해온 청와대의 사태 해결 방정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김 대표 수첩’ 메모 하나가 ‘문고리 권력’과 ‘십상시(十常侍)’로 상징되는 ‘환관 권력’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 비서관은 교체할 이유가 없다”는 신년기자회견 이후 심상찮게 돌아가던 분위기가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로 접어들었다. 윤희웅 정치컨설팅 ‘민’ 여론분석센터장은 “이런 와중에 만일 세 비서관과 관련한 작은 비리라도 하나 터지면 정국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칠 것이고, 박근혜정부는 조기 레임덕에 빠져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군’으로부터 신임을 재확인했지만, 김기춘 비서실장과 ‘비서관 3인방’ 등 청와대 핵심 참모진들로서는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친박계 국회의원 모임인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 주최한 2014년 11월19일 행사에서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맨 오른쪽)이 축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무성 대표는 1월6일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의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이준석 전 혁신위원장에게서 ‘문건 파동 배후설’을 들은 후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엿새 후 언론을 통해 김 대표의 메모 수첩 사진이 공개되자 정치권 안팎에서는 “김 대표가 의도적으로 언론에 노출시켰을 것”이라는 의혹이 무성했다. 지난해 10월 상하이발 개헌 발언이 기자들 앞에서 나온 의도된 발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맥을 같이한다. 그 배경에는 청와대 참모 그룹을 바라보는 김 대표의 시선이 담겨 있다. ‘더 이상 청와대 조무래기들의 움직임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격한 감정이 배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 대표는 ‘의도적 공개설’에 대해 “본회의장에서 다른 메모를 찾다가 우연히 찍힌 것”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평소 의원들에게 언론사 카메라 주의 당부

하지만 정치권 인사들의 얘기는 다르다. 김 대표가 국회 본회의장 맨 뒷좌석에 위치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쉽게 언론에 노출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평의원 시절이던 지난 2013년 6월, 비공개 당 회의에서 자신이 한 NLL 관련 발언이 외부로 유출돼 곤욕을 치렀다. 한번은 본회의장에서 김 대표가 자신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이 언론사 카메라에 잡혔다. 거기에는 ‘유출자가 김재원 의원’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게 보도되면서 결국 김 의원은 김 대표를 찾아가 해명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김 대표는 본회의장에서 동료 의원들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수첩 등을 보다가 그 내용이 언론사 카메라에 잡히면 경고를 보내는 등 언론 노출에 극도로 신경을 써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 스스로가 적극 부인하는 상황에서 그가 의도적으로 수첩 메모를 노출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김 대표가 음 전 행정관의 ‘문건 파동 배후설’ 발언을 “황당한 이야기”라고 치부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김 대표는 이준석 전 위원장으로부터 해당 발언을 들은 이후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을 통해 분명한 청와대의 처분을 요구했다. 청와대로부터 “사실무근”이라는 답변을 듣긴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김 대표는 이 전 위원장으로부터 음 전 행정관의 술자리 발언을 전해 들은 이틀 후인 1월8일 이정현 최고위원과 김회선 의원을 대표실로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두 사람을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의원은 음 전 행정관이 청와대로 들어가기 직전 그를 보좌관으로 데리고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음 전 행정관은 권영세 전 의원을 비롯해 이 최고위원과 김 의원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에 따라 “김 대표가 음 전 행정관에 대한 인물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차원의 호출이 아니었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

김 대표가 1월6일 이전에 이미 ‘문건 파동 배후설’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김 대표는 당시 이 전 위원장에게 “(음 전 행정관이 배후로 지목한 인사가) 나냐, 유 의원이냐”고 물었고, 이 전 위원장은 “둘 다 언급됐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 전 위원장은 1월14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김무성 대표의 수첩 메모를 보면 (여러 경로에서 온) 메시지가 혼재된 것 같다. 내가 한 말과 다른 사람이 한 말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친박 핵심 참모들, 여론의 표적 될 처지

음종환 전 행정관의 ‘문건 파동 배후설’ 발언을 전후로 당·청  간에 미묘한 기류가 감지됐다는 점도 김 대표로서는 이 발언을 술자리 해프닝으로 보기 힘든 대목이었을 수 있다. 최근 들어 김 대표에 대한 청와대와 친박계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얼마 후 ‘당권 사유화’ 논란이 빚어졌고, 박세일 교수를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임명하려는 과정에서도 친박계가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런 와중에 친박계 의원들의 모임인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은 지난해 말 대규모 송년 모임을 열고 김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청와대도 가세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9일 대선 승리 2주년을 맞아 새누리당 3선 이상 친박 중진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송년 만찬을 열었다.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친박계 원로인 서청원 최고위원 등이 참석했지만 김무성 대표 등 당직자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집권 여당 대표를 무시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 대표 측근인 이군현 당 사무총장이 청와대 신년 행사 참석자 명단에서 누락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 대표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라는 분석이 나왔다. 음 전 행정관의 발언은 김 대표에 대한 청와대와 친박계의 시각을 여과 없이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됐든 김무성 대표와 비박 진영은 수첩 메모 사건으로 수세 국면에서 상황을 역전시켰다. 청와대를 향한 직접적 공격은 피하면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청와대 행정관의 부적절한 처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는 청와대 참모진의 ‘얼라들 행태’를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친박 입장에서 더욱 뼈아픈 구석은, 박 대통령을 호위하는 당내 친박계와 청와대의 핵심 참모그룹의 한 축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가 음 전 행정관 한 명의 면직 처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그것이다. 2월 말로 예상되는 청와대 조직 개편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의 교체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와 함께 ‘비서관 3인방’을 포함해 ‘십상시’로 통하는 청와대 친박 핵심 참모 그룹은 여론의 표적이 될 처지에 놓였다.

김 대표와 각을 세우며 새해 들어 일전을 별렀던 친박계로서는 치명적인 역습을 당했다. 여권 내 한 친박 인사는 “평소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 때문에 음 전 행정관은 항상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으로 여겨졌다”며 “하지만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버리니,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라며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 대표는 ‘수첩’ 같은 우회로가 아닌 직공의 칼을 어느 시점에 뽑을 것인가. 당장 새누리당 원내사령탑을 뽑는 원내대표 경선전이 정국의 뜨거운 관심사로 떠오를 전망이다. 

 

청와대, 유승민과도 루비콘 강 건너나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 비서관들을 향해 “청와대 조무래기들”이라고 일갈한 것에 앞서 유승민 의원은 지난해 말 “청와대 얼라들”이라고 촌평한 바 있다. 두 사람은 한때 ‘친박’ 핵심이었다가 지금은 ‘탈박(脫朴)’으로 분류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때문에 청와대와 친박에서 두 사람을 보는 시선은 차갑다. 음종환 전 청와대 홍보수석실 선임행정관의 ‘정윤회 문건 파동 배후설’ 발언으로 청와대와 유승민 의원 간의 복잡 미묘한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음 전 행정관이 배후설 발언을 부인하는 과정에서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김 대표와 유 의원에게 줄 대기를 해 공천을 받으려고 한다”고 말한 것이 사태를 더욱 키우고 있다. 유 의원은 “조 전 비서관과 한 번 만난 것은 맞다. 물론 공천의 공자도 그 자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청와대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유 의원을 사찰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청와대와 유 의원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면서, 오히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청와대다. 유 의원은 오는 5월이나 그보다 좀 더 앞당겨질 수도 있는 원내대표 선거에서 이주영 의원과 함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당초만 해도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세월호 참사 처리 과정에서 진정성을 보여준 이 의원의 우세가 조심스럽게 점쳐졌지만, 이번 사태로 ‘친이(명박)계’를 포함한 ‘비박(근혜)’ 진영이 유 의원을 중심으로 뭉칠 경우 승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청와대에서는 이 의원을 밀고 있다는 게 당내 정설이다.

만약 유 의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되면 김무성 당 대표와 함께, 새누리당은 ‘비박계 천하’가 된다. 특히 여당 원내대표는 박근혜정부의 국정 운영을 입법 부문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집권 3년 차 동력으로 ‘경제 살리기’를 내건 박근혜정부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유 의원의 원내대표 당선이 박근혜정부 ‘레임덕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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