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억제하던 연산군, 말로 비참했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3.01.2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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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① / “모두가 충성하여 정성 바치길 바라노라”

서울 청량리에 회기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한자로 回基洞이라고 쓴다. 하지만 이 동네의 본래 이름은 회기(懷基)이다. 회묘 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회묘는 바로 연산군의 생모 윤씨(1445~82)의 무덤이다. 지금 폐비 윤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의 서삼릉 지역에 이장되어 있다.

연산군의 생묘 윤씨에게는 폐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윤씨는 성종의 왕비였다. 자태가 빼어났다고 하는데, 성종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불과 여덟 살밖에 많지 않은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 때문에 성종 10년(1479년)에 폐출되었다가 이듬해 38세의 나이에 사약을 마셔야 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폐비 윤씨 묘. ⓒ 연합뉴스
연산군,‘생모’ 윤씨 폐위시킨 인사들 탄압

윤씨가 죽은 뒤 7년이 지난 1489년에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표석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1494년에 성종 역시 38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20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임사홍의 밀고를 계기로 연산군은 성종 때의 시정기를 열람하고, 자신의 생모는 정현왕후(자순대비)가 아니라 폐비 윤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생모를 위해 효사묘를 세우고 무덤을 회묘라 했다. 재위 10년(1504년)에는 생모의 시호를 제헌(齊獻)으로 추증하고 무덤을 회릉으로 격상시켰다. 묘호에 품을 회(懷)자를 쓴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연산군은 생모를 폐위시킬 때 관여한 사람들과 윤씨의 복위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고 공신들을 억압했다. 이 사건이 갑자사화이다. 그러다가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죽게 되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때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해쳤기 때문에 혼암한 군주라고 지목받는다. 하지만 연산군도 볼만한 사업을 남겼다. 연산군은 재위 5년(1499년)에 <성종실록>을 완성하고 <동국명가집>을 엮었다. 재위 6년(1500년) 9월에는  <속국조보감> <농사언해> <잠서언해> <여사서내훈언해>를 간행했다. 재위 7년(1501년)에는 성준과 이극균이 <서북제번기> <서북지도> 등을 편찬해서 올렸다. 그해 10월에는 성현과 임사홍이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마쳤다. 이듬해 정월에는 중국에 사람을 보내 염직을 배워 오게 했고, 3월에는 김익경이 제작한 수차를 충청·경기도 등에 보급했다. 6월에는 사치스런 혼인을 금지했다.

그렇지만 연산군의 정치는 1498년의 무오사화 때 이미 방향성을 잃었다. 김종직의 문인 김일손은 성종 때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를 했으며 이조정랑을 지냈다. 그 후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 헌납으로 있을 때는 이극돈과 성준이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해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그러다가 연산군 4년(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이 썼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이것이 이극돈을 통해 연산군에게 알려져 김일손은 사형에 처해지고, 다른 많은 사류도 화를 입었다. 곧 무오사화이다.

문신들, 자기 견해 피력하지 못한 채 순종

무오사화 이후에 연산군은 갱화시(?和詩)나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올리게 해 사장(詞章)을 왕권에 굴종시켰다. 당시 연산군이 ‘원림에 한식의 철이라 삼월이라 가까우니, 비바람에 낙화하여 오경이 춥도다(寒食園林三月近, 落花風雨五更寒)’라는 제목을 내어 승지와 사관, 경연관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올리라고 했다. 이때 도승지 강혼은 찬란한 색채어를 사용하고 미사를 늘어놓아 향락을 노래했다.

연산군은 재위 7년(1501년) 4월23일(경자) 밤에 홍문관 관원을 서빈청에 모아 칠언율시를 짓게 했다. 연산군은 다음 4개의 시제를 내렸다.

 

첫째, ‘당나라 명황이 촉에 거둥하매 양귀비가 죽으니, 비록 빈(嬪)과 궁녀들이 있어도 기꺼이 보지 않더라(明皇幸蜀楊妃死, 縱有嬪?不喜看).’

둘째, ‘달 떨어진 뜰 안에 사람 소리 시끄러우니, 누가 장원한 사람인지 모르겠도다(落月半庭人擾擾, 不知誰是壯元郞).’

셋째, ‘일색으로 살구꽃이 삼십 리를 덮었는데, 신랑이 탄 말이 날아가는 것 같구나(一色杏花三十里 新郞君去馬如飛).’

넷째, ‘부용이 가을 강물 위에 살아 있으되, 봄바람을 향하여 피지 못함을 원망하지 않는구나(芙蓉生在秋江上 不向東風怨未開).’

 

문신들은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지 못한 채 왕권에 순종해 승평을 찬미해야 했다. 또한 연산군은 연회를 즐겨, 일찍이 다음 절구를 지었다고 한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공
시절이 어진 이들과

멋진 정자에서 연회하길 허여하여

한가로이 꽃과 술 즐기며

태평세월임을 깨닫네

어찌 다만 은혜 두터운 것만 좋아하랴

모두가 충성하여 정성 바치길 바라노라

 

時許群賢宴畵亭(시허군현연화정)

閑憑花酒覺昇平(한빙화주각승평)

何徒爭喜鴻私厚(하도쟁희홍사후)

咸欲思忠獻以誠(함욕사충헌이성)

 

어진이 이를 존중해서

은대(승정원)의 모임을 허락하니

봄기운이 긴 길에 가득하여

준마를 재촉하네

취해서 한가하게 달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돌아올 때도 악대를 이끌고

다시 배회할 만하구나

 

重賢寬許會銀臺(중현관허회은대)

春滿長途叱撥催(춘만장도질발최)

不?醉憐閒夜月(불시취련한야월)

歸牽歌管可重徊(귀견가관가중회)

 

연산군은 신하들이 당시를 태평성대로 찬미해주기를 바랐다. 비판을 억제하고 찬양만을 바랄 때, 그 정권의 말로는 비참하다. 그 사실을 연산군은 몰랐던 것일까?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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