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학생 자살 이후 '210일 기록'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07.23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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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가족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다" / 자식 잃은 어머니, “학교 폭력은 엄연한 범죄”라며 격정 토로

학교 폭력 피해자 권승민군의 어머니 임지영씨가 아들의 방에서 영정을 어루만지며 아픈 가슴을 달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대구 수성구의 ㅊ아파트 입구에서 인터폰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지 않았다. 연거푸 번호를 눌렀지만 그때마다 먹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휴대전화로 방문 사실을 알렸더니 임지영씨(48)가 현관 입구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지난해 12월20일 학교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던 대구 중학생 권승민군(당시 13세)의 어머니이다.

임지영씨가 아들을 떠나보낸 뒤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임씨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푸석푸석했고, 안색은 창백했다.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어 금방이라도 눈물샘이 터질 것 같았다. 얼굴은 태연하게 보였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였다.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멈춰섰다. 임씨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안내했다. 7개월 전에 둘째아들 승민이가 학교 폭력을 견디다 못해 뛰어내린 곳이다. 교사인 아버지와 고등학생인 큰아들은 때마침 외출하고 없었다. 임씨는 “우리 민이(엄마는 아들을 ‘민’이라고 불렀다)가 자주 앉았던 자리이다”라며 쇼파를 가리켰다. 그는 쇼파에 앉아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며 “민이는 여기에 베개를 베고 누워서 TV를 보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기자는 거실 바닥에 앉아 작은 탁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전원을 켰다. 그때가 7월17일 저녁 8시였다. 그때부터 임씨가 겪었던 ‘2백7일간’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한 가족의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임지영씨는 경북 영천에 있는 금호중학교 교사이다. 승민이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날은 학업성취도 평가가 있었다. 그는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해서 시험 준비에 열중했다. 오전 8시30분쯤 승민이 담임인 김 아무개 교사(34)에게 휴대전화 문자가 왔고 전화 통화를 했다. 운명을 가르는 전화였다. 담임교사는 ‘승민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라고 물었다. 임씨는 “아침에 친구하고 학교에 간다고 했다. 내가 집에 가보겠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승민이가 ‘그냥 자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이날 아침 승민이가 시무룩해 보였지만 크게 이상한 점은 못 느꼈다. 출근할 때도 평상시처럼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담임교사와 전화를 끊고 집에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이번에는 승민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평상시 남편과 아이들의 전화번호를 단축키로 저장해놓은 상태였다. 승민이는 ‘4번’이었는데,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임씨는 “‘왜 이러지’라며 황당하게 생각했다. 갑자기 승민이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아 남편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았다. 그리고 전화했는데 역시 받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권승민군이 죽은 뒤 성당 신부가 임씨에게 준 십자가와 묵주. ⓒ 시사저널 임준선
승민이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을 때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승민이가 사고가 났다”라는 것이다. 임씨는 부리나케 승용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영천에서 대구의 집까지는 약 40분쯤 걸린다. 아파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신매동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임씨는 “그때 경찰관이 ‘사고가 났다’고 해서 처음에는 교통사고인 줄 알았다. 우리 아파트 근처 큰길에서 가끔 사고가 났다. 그런데 파출소에서는 ‘교통사고가 아니다’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다. 

임씨는 아파트에 도착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찰에 전화해서 ‘집으로 올라갈까요?’ 하니까, ‘1층으로 오라’고 했다. 1층에 가보니 아파트 경비가 나와 있었고, 경찰차도 있었다.

경찰관이 ‘시체를 확인해달라’며 하얀 천으로 덮인 곳을 가리켰다. 임씨는 하얀 천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천을 걷었다. 그랬더니 거기에 승민이가 누워 있었다. 외상도 없고 얼굴 오른쪽 이마에 약간의 멍이 생긴 것 외에는 겉보기에 깨끗했다. 승민이의 상체를 들어 안았다. 순간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무슨 일이냐,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데. 어서 119를 부르라”라며 소리쳤다. 그때 승민이 코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임씨는 “손을 만졌더니 차가웠다. 내 옷 속에 민이의 손을 집어넣고 계속 비볐다. 아직 이렇게 따뜻한데…”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곧이어 상황을 깨달은 임씨가 그 자리에서 울부짖었다. 하늘이 떠나갈 듯 울고 또 울었다. ‘이건 아니다’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꿈만 같았다. 그는 지금도 “내가 꿈을 꾸는 것 같다”라고 착각한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안고 있으니 경찰관이 다가왔다. “진정하라. 아마 위에서 뛰어내린 것 같다”라고 했다. 임씨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아파트 베란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승민이의 시신은 집에서 가까운 천주성삼병원으로 옮겨졌다.

임씨는 경찰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원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날따라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탁자와 쇼파 위도 가지런했다. 승민이가 해놓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승민이 방에 들어가 보니 책가방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대신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승민이의 유서는 거실과 부엌 사이의 다리미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곳은 임씨가 퇴근하면 핸드백을 놓는 자리였다. 승민이는 엄마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유서를 남겼던 것이다. 유서는 A4용지 넉 장 분량이었다. 임씨는 “처음에는 유서에 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맨 뒷면의 ‘엄마, 아빠 사랑해요!!!’밖에 보지 못했다. 그냥 부들부들 떨리기만 했다”라고 기억했다.

승민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시체 검안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검안에는 임씨와 승민이의 학교 담임교사·부장교사·교감 등이 참여했다. 몸에는 이곳저곳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다. 엉덩이, 허벅지, 목, 손, 발 등 몸 구석구석에 멍이 있었다. 임씨는 “애를 얼마나 팼는지 멍이 아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언제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는 멍도 있었다. 멍이 오래되어서 없어져가는 것도 보였다”라며 목청을 높였다. 

승민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된 또 다른 유서(오른쪽 ⓒ 시사저널 임준선 ).

‘도망’가듯 이사할 생각은 버렸다

승민이 아버지는 그때까지 아들이 죽었는지 몰랐다. 병원에 도착한 후 주위 사람들에게 “몇 층이냐”라고 물었고, ‘지하 2층’이라고 하자 장례식장으로 들어오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임씨는 “남편이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선생님들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는데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반쯤 넋 나간 사람처럼 있었다”라고 말했다.

큰아들 승윤이도 동생의 사고를 모른 채 병원에 도착했다. 나중에 내막을 전해 듣고는 기절하듯이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임씨 가족은 이날 세상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냈다. 단란했던 한 가정의 행복은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졌다. 승민이의 시신은 화장한 후 팔공산에 있는 도림사 내 추모공원에 안치했다. 임씨와 가족들은 매주 주말이면 도림사를 찾아가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승민이의 책상에 있는 유품을 정리하는 도중에 유서 한 장이 또 나왔다. 여기에는 ‘죄송해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저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몇몇 애들이 알고 있어서 제가 없을 때도 문 열고 들어올지 몰라요.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말 죄송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들은 승민이를 떠나보내지 않았다. 승민이의 유품 중 평소 아끼던 물건과 책은 남겨놓았다. 승민이가 쓰던 방도 아직 그대로이다. 임씨는 침대 위의 이불을 가리키며 “승민이는 노란색을 참 좋아했다”라고 말한다. 진한 가을 은행잎 같은 노란색 이불이 침대를 덮고 있었다.

책꽂이에는 승민이가 즐겨보던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사전, 소설, 문화재도감, 역사 관련 서적 등도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생전의 그대로는 아니다. 책상 위에는 승민이의 영정이 놓여 있다. 그 주변은 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 묵주가 감싸고 있다. 승민이가 생각날 때마다 임씨는 책상에 앉아 아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를 한다. 그는 “우리 가족은 민이를 일부러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지운다고 해도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늘 같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생각할 것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것도 같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현실은 참담하다. 승민이가 떠난 지 얼마 후 임씨는 베란다에 잠깐 나갔었다. 그때 애들이 하교하는 것을 보았다. 임씨는 “우리 민이도 오겠다. 그래서 방문까지 주르륵 왔는데, 방문 앞에 우리 민이의 영정이 있었다. ‘이게 현실이 아니구나’ 하며 민이의 영정을 붙잡고 울었다”라고 말한다. 길을 지나가다가 승민이 또래의 아이들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잠을 자다가도 불쑥불쑥 깬다. 승민이가 베개를 들고 서 있는 것 같아서다.

지금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 평소 승민이는 엄마가 집에 일찍 왔을 때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교사인 임씨 학교에 시험이 있는 날이면 ‘엄마 빨리 오세요’라고 말했다.

승민이가 떠난 후 가족들은 밥을 먹지 못했다. 밥상에 마주 앉으면 말을 잊은 채 울기만 했다. 승민이는 생전에 피자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피자 광고만 나와도 아들이, 동생이 떠올랐다. 특히 MBC <무한도전>을 1회부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다 볼 정도로 광팬이었다. 가족들은 승민이를 생각하며 가끔 <무한도전> 재방송을 본다. 방송 때마다 옆에서 자세히 설명해주던 승민이는 이제 없다.

임씨에게 ‘이사 갈 생각은 안 했느냐’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이사할 생각도 했다. 주변에서도 ‘빨리 잊으려면 유품을 정리하고 이사를 가라’고 권유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피해서는 안 된다. 남편한테도 애한테도 안 간다고 했다. 가해자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우리가 도망가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승민이의 어릴 적 꿈은 개그맨이었다. 나중에는 ‘정의의 검사’를 꿈꾸었다. 성격도 밝고 쾌활했다. 가족들과 농담도 잘 하고 장난기도 많았다. 그래서 임씨 집에는 항상 ‘하하호호’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승민이가 죽은 후에는 1백80˚ 달라졌다. 임씨 집에는 말과 웃음이 사라졌다. 왁자지껄하던 집안에는 조용한 절간처럼 ‘침묵’이 흐른다.

임씨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편에 든다. 잘 울지도 않는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가족들이 있으면 억지로 참는다. 가장 힘든 때가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운전하는 때이다. 요즘은 안 울려고 기도하며 산다”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실제 임씨는 인터뷰 내내 감정이 북받쳐올 때도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남은 인생 ‘학교 폭력 감시자’로 살기로…

이렇게 임씨 가족들은 모두 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가족 전체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야만 생활할 수 있다. 임씨는 “우리 부부는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큰애 승윤이는 정신과 치료가 싫다고 해서 경찰에서 제공하는 ‘케어(care)’ 팀의 도움을 받고 있다. 학교 교사인 남편은 아직도 휴직 중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임씨 가족들이 절망의 늪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다시 세상 속에 나오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 임씨는 ‘학교 폭력 감시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할 계획이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것이다. 학교 폭력을 예방하고 또 가해 학생들도 상담해서 살길을 열어주도록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임씨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학교 폭력은 엄연한 범죄이다. 학생이라고 해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도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다.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그리고 피해 학생들도 절대 ‘자살’을 선택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자살은 해결책이 아니다. 남은 가족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다”라고 말했다. 임지영씨는 최근 자신의 심경을 담은 책을 펴내며 세상과의 소통에 나섰다.


가해 학생들이 지난해 12월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가해 학생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깊이 반성하고 있을까. 또, 그 부모들은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을까. 임씨는 고개를 내젓는다. 가해자인 우 아무개군(15)과 서 아무개군(15)의 폭행과 고문, 갈취는 언론을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어린 학생들이 했다고 믿지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 전 국민의 공분을 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은 대담했다. 승민이가 죽은 날에도 몰래 문을 열고 임씨 집을 다녀갔다. 승민이가 병원에 있다고 하니까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아파트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승민이의 장례를 치르고 있던 때에도 아파트를 찾아와서 ‘자살’했는지를 묻고 갔다. 승민이가 죽은 사실을 안 후에는 ‘(이정도가) 폭력이냐, 감방에 안 간다 ㅋㅋㅋ’라는 문자를 주고받기도 했다. 가해 학생이나 부모들은 승민이 장례식장에 찾아오지 않았다.

가해 학생들은 지금까지 사과하거나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임씨가 법정에 나가 진술할 때도 고개를 숙인 채 판사가 ‘반성하느냐’라고 묻자 ‘예’라고만 대답했을 뿐이다. 그것이 끝이었다. 임씨는 “정말 반성하는 것이라면 내가 증언할 때 울면서 ‘죄송하다’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임씨는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 말이 나오자 몸서리를 쳤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는 승민이가 죽은 후 끊임없이 찾아오거나 연락을 해왔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같이 식사나 하면서 합의 이야기를 하자”라고도 했다. 그렇게 찾아오던 부모들도 1심에서 형이 선고되자 발걸음을 뚝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항소했다. 임씨는 “‘벌을 달게 받겠다’고 해서 항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를 찾아온 것은 ‘사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합의를 이끌어서 형량을 줄여보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우군의 부모는 항소한 이후에 다시 태도가 돌변했다. 불시에 집으로 찾아오거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내 아들이 불쌍하니 탄원서를 써달라’며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승민이의 유골이 안치된 추모관에 ‘발원문’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 유족들은 이런 행태를 ‘형량을 감소시키기 위한 꼼수’로 보았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는 2심 선고 공판이 끝난 후에는 더는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이들 부모들은 2심 선고에 불복했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6월28일 서 아무개군에게 징역 장기 3년에 단기 2년 6월, 우 아무개군에게는 장기 2년6월에 단기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은 지금 김천교도소로 이감된 상태이다.


 
 

ㄷ중학교, 앞에서는 ‘사과’하면서 뒤에서는 ‘은폐’ 급급해했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또 다른 ‘가정’이다. 담임교사는 부모를 대신한 어머니, 아버지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에는 학교와 교사의 책임도 크다. 지금까지 발생한 ‘학생 자살’을 보면 학교는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은폐’하기에 바빴다. 승민이가 다녔던 ㄷ중학교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임씨는 ㄷ중학교와 담임교사가 보여준 행태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승민이 장례식장에 ㄷ중학교 교사들이 많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네 명이 왔다가 중간에 계속 바뀌었다. 그들은 영정이 있는 곳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들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마지막 가는 제자를 애도하고 유족을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라고 토로했다.

경찰은 학교측에 승민이의 자살을 함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가해자들이 말을 맞추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학교측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장례식장 앞에서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문상을 막았다. 승민이와 절친했던 친구들조차 들어가는 것을 차단했다. 승민이 아버지 지인들이 한 지상파 방송에 제보하고, 기자들이 도착하기 전인 5~10분 사이에 장례식장에 있던 ㄷ중학교 교사들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ㄷ중학교는 “자살한 애 영웅 만들 일 있느냐”라며 승민이 책상에 국화꽃을 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로 꽃을 가져오는 시민들도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자살 사건’은 승민이가 처음이 아니었다. 승민이가 죽기 5개월 전에도 박 아무개양(당시 15세)이 ‘학교 폭력’ 때문에 자살했다. 학교는 ‘교통사고’라며 사실을 은폐했다. 임씨는 “학교에서 쉬쉬하지 않고 그때만 제대로 대처했어도 우리 애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분개했다.

유족들은 지난 2월9일 학교법인과 ㄷ중학교의 교장·교감·담임교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학교 폭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학교측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그런데 유족들은 학교측이 법원에 낸 답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임씨는 “내용을 보니 기가 막혔다. 학교측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었다. 민이의 죽음을 오로지 ‘가해 학생들과의 문제’로 치부했다. 학교와 교사의 양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라며 기막혀 했다.

담임교사 김씨는 승민이의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안 했다고 한다. 대신 가해 학생들의 2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섰다. 그는 법정에서 “(가해 학생들이) 일진도 아닌데 형량이 너무 많다. 선처해달라”라고 호소했다.

임씨는 울분을 삼켰다. “담임에게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민이가 죽을 때까지는 수수방관하고, 지금은 아무런 반성 없이 가해자 편에 섰다. 담임은 그저 책임을 모면하기에만 바빴다”라며 씁쓸해했다.

ㄷ중학교는 겉으로는 ‘사과’를 운운하면서도 승민이의 흔적은 재빠르게 지웠다. 승민이의 주민등록이 말소되기 전에 제적 처리하며 학적부에서 지웠다. 물론 부모에게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학교측은 이렇게 승민이의 죽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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