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대 두드리는 한국계 미국 극작가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4.10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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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작품 동시 막 올려…이민자 가족 해체 그려 호평

연극 ⓒ 공연제작센터

연극계에 한국계 미국인이 쓴 작품들이 수입되고 있다. 한국계 이민자 후예들이 미국에 정착한 뒤 그 2세들이 영어로 자신의 삶을 대본으로 옮겨 무대에 올린 것이 그쪽 사회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처음은 아니다. 자발적 이민자가 대부분인 한국계 미국인에 비해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 중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계 일본인(자이니치)은 한국계 미국인보다 훨씬 더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아메리칸 환갑>, 완성도 뛰어나다는 평가받아

고난이 예술의 자양분이 되었을까. 이들의 눈물겨웠던 고난만큼 일본에서 자이니치 극작가나 연출가의 활동은 일찍부터 도드라졌다. 1980년대에 김봉웅(일본 필명 쓰카 고헤이)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신주쿠양산박의 김수진이나 정의신이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각광받고 있다. 특히 극작가 겸 연출가인 정의신의 작품은 지난 2011년 우리나라에서 <야끼니꾸 드래곤> <아시안 스위트> <쥐의 눈물> <겨울 선인장> 등 무려 4편이나 공연되는 등 절정의 인기를 얻고 있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중 바다를 건넜던 1, 2세대 재일 한국인의 어려웠던 삶을 3세대 자이니치의 눈으로 그려내 한·일 양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일본말로 자신과 이웃의 삶을 무대 위에 옮겼고, 그 무대는 일본에서 먼저 호응을 얻은 후 한국에 다시 수입되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작품은 최근 두 작품이 동시에 무대에 올랐다. 극작가 성 노(46)의 <비 내리는 클리브랜드>와 로이드 서(37)의 <아메리칸 환갑>이 그것이다. 지난 4월8일까지 국내 초연된 성 노의 <비 내리는 클리브랜드>는 그의 데뷔작이다. 미국에서는 1995년 시애틀에서 초연되었다. 내용은 미국 오하이오 주의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미국으로 이민 온 뒤 가족 해체의 아픔을 겪으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재미교포 젊은이들의 내면을 포착했다.

오는 4월22일까지 게릴라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아메리칸 환갑>은 로이드 서가 쓴 작품으로, 지난 20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초연되었고 이후 재공연을 계속하면서 작품을 계속 매만져 상당한 완성도를 가진 작품으로 호평받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이민자 가족의 해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블랙코미디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다. 15년 전 미국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한 뒤 홀로 한국으로 돌아갔던 전민석이 환갑을 맞아 미국에 남겨둔 부인과 2남1녀를 찾아와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풀어내고 있다. 극에서는 한국에서 주류로 살다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이민가 방황하고 좌절하는 아버지와 아시아계 이민자 2세로 시작부터 마이너리티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2세들의 고민과 좌절을 담담하게 펼쳐낸다. 

로이드 서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뉴욕 뉴스쿨 대학에서 극작을 배운 뒤 현재 뉴욕의 라크 극발전센터(LPDC)의 소장을 맡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만리장성 이야기>와 <세상의 행복한 종말> 등이 있다. 최근 방한했던 로이드 서는 미국 내 한국계 극작가의 활동에 대해 묻는 질문에 <비 내리는 클리브랜드>의 성 노, <용비어천가>의 영진리,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줄리엣 최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미국 이민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보여줘

이 중 ‘영진리(이영진)’는 미국 주요 언론에서도 크게 취급될 정도로 인지도를 얻고 있다. 2006년 <용비어천가>가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2009년 작 <선적(Shipment)>이 뉴욕타임스 아트 섹션 톱기사로 실리기도 했고, 최근작 <재미없는 페미니즘쇼>를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면서 미국 내 언론에서 그는 ‘미국 내 대표적 실험극 작가의 하나’로 칭송받고 있다.  

극작가 로이드 서. ⓒ 공연제작센터
한국계 미국 작가들이 한국계 이민자의 경험을 풀어놓으면서 조금씩 주류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환갑>의 국내판 제작자이자 연출가인 윤광진 공연제작센터 대표는 “<아메리칸 환갑>은 완성도 면에서 대단히 훌륭하다. 외국에서 태어난 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이만한 완성도를 가진 작품을 썼다는 것은 국내 작가들에게 경각심을 줄 만한 일이다. 한국판 공연에서는 미국판 공연보다 코믹한 요소가 줄어들었다. 여러 이민자가 모여 있는 미국에서는 코미디 요소가 강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직접적인 이야기라 좀 더 진지해진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이 국내에 앞서 필리핀에서 공연된 사연도 소개했다. “미국판 공연에 엄마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가 필리핀계 미국인인데 필리핀에서도 유명했다. 그의 소개로 필리핀의 국립극장 격인 필리핀컬쳐센터에서 공연이 올라갔다. 필리핀도 돈벌이를 위해 해외로 떠나간 가장이나 식구들이 많다 보니 이 이야기에 공감하는 관객이 많았던 것 같다.”

20세기 후반 이후 지구촌은 자발적인 디아스포라 시대로 접어들었다. 돈과 일자리를 따라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서남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동아시아에서 북미로 대규모 인력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한국계 이민자의 가족 해체 스토리가 미국에서도 공감대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이후 역이민이 시작될 정도로 미국 이민에 대한 환상은 끝난 지 오래다. <아메리칸 환갑>은 그 환상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드라마 없는 코미디, 코미디 없는 드라마에는 관심 없다” 
로이드 서 작가 인터뷰

로이드 서는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1975년에 태어났다. 대구 출신인 부모가 1972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때문이다. 그는 “우리 가족은 한국과 강력한 유대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살았지만 나는 한국 문화, 가족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라고 표현했다. 한국 초연 무대를 지켜본 그에게 ‘한국말 대사를 알아듣느냐’라고 묻자 “한국말 대사는 어렵다”라는 한국말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계 이민자가 별로 없던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자란 그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갖고 자랐다고 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뉴욕에서 극작을 공부한 그는 자신의 희곡 대부분에 한국계 미국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내 희곡은 대부분 개인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다. 사회·정치적 구조 속의 정체성이 아니라 아버지·아들·딸·형제·친구로서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관계에 대한 고찰이 내가 가장 탐구하고 싶은 주제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메리칸 환갑>에서는 한국적인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갖고 있는 아버지와 미국식 정서와 행동 양식이 혼재해 있는 자녀, 그 둘 사이에 놓여 있는 엄마이자 부인의 존재가 독립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그는 <아메리칸 환갑>이 “기본적으로 휴먼스토리이고 한국인에게는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라고 소개했다. ‘환갑’이라는 개념이 없는 미국에서도 관객들이 연극을 보면서 점차 ‘환갑’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는 극에서 대사를 통해 몇 번이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미국 관객의 반응과 한국 관객의 반응 차이에 대해 묻자 그는 “관객의 반응은 비슷하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공연했을 때도 해외에 취업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공감대가 컸는지 반응이 좋았다. 나는 드라마 없는 코미디, 코미디 없는 드라마에는 관심이 없다”라는 말로 자신의 취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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