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삶 계속돼도 신변 위험은 없다
  • 진희관│인제대 통일학연구소장 ()
  • 승인 2011.10.1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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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2월11일 중국 베이징 공항에 나타난 김정남. ⓒ연합뉴스

김한솔이라는 인물이 화제이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페이스북에 올려진 그의 사진을 보면 김한솔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만큼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홍콩의 학교에서 보스니아 학교로 이동한다는 보도 기사와 함께 김정남에 대한 행보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 수년간 김정남에 대한 국내 언론의 예측 보도들은 극과 극을 왕래한 바 있다. 2004년을 전후해서 후계자로 김정남 또는 김정일의 차남인 김정철이 유력하다는 추측들이 나왔고, 2008년 하반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심혈관계질환으로 와병 중일 때는 ‘김정남 역할론’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남 김정은으로 후계 구도가 확정되어가자, ‘김정남 망명설’과 ‘암살설’ 등이 난무했으며, 심지어는 김정남이 “북한은 붕괴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는 설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진 바 있다. ‘맞으면 좋고, 틀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발언과 보도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 체제 논리상 ‘반동’ 행태는 불가능

이제 북한의 후계자는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복형인 김정남의 위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당연히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김정남은 후계자 김정은보다 열두 살이 많은 1971년생으로 올해 만 40세에 해당된다. 어린 시절 평양에서 생활할 때 그는 ‘황태자’였기 때문에 일반 학교를 다니지 못해 외종사촌들과 함께 폐쇄된 관저에서 생활했다. 청소년기를 러시아 모스크바와 스위스 제네바 국제학교를 왕래하면서 보냈는데 그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컴퓨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01년 5월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불법 입국으로 체포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생모인 영화배우 성혜림의 일상과도 관련이 깊다.

성혜림은 1970년대 초반 김정일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지만 부부 관계라고 하기보다는 당시 ‘황태자’였던 김정일의 정신적 동료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성혜림의 언니이면서 관저의 지배인 역할을 했던 성혜랑의 저서 <등나무 집>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에 있던 성혜림이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병을 이유로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김정일이 새로운 여인 고영희(정철·정은의 생모)와 함께 살게 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때 어린 시절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김정남도 외조모의 권유 등으로 인해 생모를 따라 유럽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종사촌(성혜랑의 자녀인 남매)이 동행했었다.

(위)ⓒ 연합뉴스, (아래)ⓒ 연합뉴스

요컨대 김정남은 생모의 모스크바행과 동시에 김정일의 눈에서 점차 멀어져간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더욱이 유럽 생활에 젖어든 생활 방식을 가지고 북한에 돌아가 생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인데, 이는 함께 생활했던 이종사촌 형인 이한영(한국행 이후 사망)의 저서 <김정일 로얄패밀리>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리고 이한영 역시 유럽에서의 생활로 자유로움을 동경하게 되었는데, 명절에 일시 귀국했을 경우에도 관저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답답함을 호소하는 심경들을 저술에 남기고 있다. 결국 그의 여동생은 유럽으로 망명했고, 이한영 역시 한국행을 선택한 바 있다. 이들과 함께 생활한 김정남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 역시 자유로움을 부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평양에는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사실상 부인인 고영희가 있었다는 점이 더욱더 평양행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후계자는 고영희의 아들 김정은의 몫이 되었고, 김정남의 위상은 오리무중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 김정남은 마카오를 배경으로 해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 또는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국내 언론들의 보도에서와 같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진 촬영이 가능한 동선을 보이며 생활하고 있다. 김정철·정은 형제가 자가용 비행기로 이동하기 때문에 동선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과 비교할 때 김정남에 대한 추적은 어렵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김정남에 대한 ‘권력 암투설’ 혹은 ‘암살설’은 현실성이 극히 떨어진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더하게 된다.

지난 2009년 1월 베이징 공항에서 기자들이 북한의 후계 구도를 묻는 질문을 하자 김정남은 “아버지께서만이 결정하실 것이다”라고 못 박아둔 적이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체제 논리상 후계자는 전 인민적 추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전 인민을 대표하는 뇌수가 바로 수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따라서 북한 논리대로라면 김정일의 결정이 인민의 결정이기 때문에 김정남의 발언은 북한 체제 운영 논리(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및 영도 체계)와도 들어맞는 언급이다. 이렇게 본다면 만일 김정남이 세력을 만들어 ‘반동’의 행태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수령제 사회인 북한의 작동 논리를 뒤엎는 행동이 된다.

그리고 김정남의 망명설 또는 암살설 등이 있는데, 이 또한 기존의 관례와 비교할 때 생각하기 어려운 가설이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의 이복동생인 김평일 폴란드 대사의 관계를 놓고 볼 때도 그러하다. 김정일은 1970년대 초 후계자로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의모인 김성애, 즉 김평일의 생모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에 대해 김정일이 ‘곁가지 무리’라고 칭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이복동생에 대해서도 ‘거세’만 했을 뿐 해외에서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을 빼앗지는 않고 있다. 어찌되었든 김평일 역시 ‘아버지 수령’ 김일성의 자제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과 김정남의 관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김정남이 권력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도 어렵겠지만, 김정남 역시 과거 김정일이 아꼈던 아들이자 장남이다. 따라서 김정은 세력 쪽에서 그를 제거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김정은은 좀 더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주변 세력을 포용하는 것이 급선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008년 8월 이후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당시 김정남의 역할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그해 10월께 프랑스를 방문해서 뇌혈관계 전문의의 북한 방문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김정남의 해외 활동 무대가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정남이 조선컴퓨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고 언급했지만, 대체로 IT 분야라든가 외화벌이 업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외국어에 능숙하고 자유로운 외국 생활이 오래된 김정남은 북한에서 보기 드문 외교 역량의 소유자로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가족의 서슴없는 해외 노출은 이런 자신의 역량을 평양을 향해 어필하는 것으로 보는 분석도 가능하다.

공개 행동 자제하고 제한적인 역할 수행할 듯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도 겐지는 최근 그의 저서를 통해 13년간 김정일을 수행하면서 김정남이 만찬에 초대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정남의 위상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김정은으로의 후계 체제가 대외적으로 공식화된 지 1년이 지나고 있다. 북한의 시급한 문제는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일이다. 그러나 주변국과의 관계가 여의치 않아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내부적으로 자원의 한계가 명확하다. 그리고 김정은은 후계 구도의 안정을 위해 내부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따라서 가족 내부의 화합을 보도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정남은 가능한 공개적 행동을 자제하고 말을 아끼면서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해나갈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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