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풍향 흔드는 ‘도청’ 진실 게임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1.07.0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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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최고위원회 회의 녹취록’의 3대 의혹에 관심 집중…누가, 어떻게 빼냈는지가 핵심

▲ 6월2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KBS수신료 인상안 처리와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이 위원장석을 점거한 가운데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KBS 카메라 기자가 이를 촬영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민주당 대표실 ‘도청 의혹’ 파문이 주목된다. 민주당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한편, 녹취록을 공개한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을 형사 고발했다. 또 한나라당과 청와대에 진상 조사를 촉구하면서 여권 전체를 압박하고 나섰다. 정치권과 거대 언론사의 ‘권·언 유착 의혹’도 새삼 도마에 올랐다. 예상치 못했던 ‘도청 파문’이 정치 하한기인 여름 정국을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

■한나라당 ‘헛발질’에 호기 맞은 민주당

“집에도 못 가고 밤을 새면서 자리를 지킨 의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지난 6월30일 오후 1시30분, 국회 본청 6층에 있는 문화체육관광통신위원회(문방위) 회의실에서 민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민주당은 KBS 수신료 인상 저지를 위해 소속 의원들이 문방위 회의실을 점거한 이후 이곳에서 의원총회를 열어왔다. 일본 순방 후 전날 귀국한 손학규 대표는 점거 농성을 해온 의원들에게 “수고 많았다”라고 인사했다.

당 지도부를 비롯해 30여 명이 모인 총회였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KBS 수신료 인상을 일단 막아낸 데 대한 격려가 쏟아졌다. 6월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리는 오후 2시가 지나자 회의장 점거 해제를 선언했다. 의원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떴고, 문방위 소속 의원 몇 명만 남은 상황에서 “본회의 중 한나라당이 날치기를 시도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본회의 중에는 상임위를 열 수 없다”라는 설명이 이어지자 한 의원이 “한나라당을 믿을 수가 있느냐”라고 웃으며 말했다. 결국 의원 한 명이 마지막까지 남기로 결정했다. 일종의 ‘승전 세레머니’였다.

민주당이 호기를 맞았다. 당 대표실에 대한 ‘도청 의혹’이 가져온 결과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원내 대결에서 줄곧 한나라당에 밀린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의석 수가 부족하다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4·27 재·보궐 선거 승리에서 확인한 민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야당으로서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결과야 마찬가지로 나올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야당의 존재감을 부각시켰어야 했다”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황우여 원내대표 체제에 비해 민주당의 김진표 원내대표 체제가 상대적으로 이슈 선점 경쟁에서 밀린다는 평가도 있다. 한나라당 친박계의 한 핵심 의원은 “황원내대표 체제를 두고 처음에는 당내에서도 약하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적으로 나서지 않지만 정책 이슈를 선점하면서 민주당이 따라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6월 국회를 ‘반값 등록금’ 국회로 만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KBS 수신료 인상 문제를 두고도 ‘갈지자’ 행보를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예상치 못한 ‘헛발질’을 하면서 반전의 기회가 저절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국회 문방위의 여당 간사인 한선교 의원이 6월24일 전체회의에서 한 의사진행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한의원은 당시 민주당이 KBS 수신료 인상 승인 건을 처리하기로 한 결정을 뒤집었다며, 그 근거로 자신이 가져온 문건에 기록된 민주당 한 최고위원의 발언을 읽어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발언이 향후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몰랐다. 한의원 다음에 여러 명의 여야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이어갔지만, 그가 가져온 문건을 문제 삼는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후 민주당이 확인한 결과, 이 발언은 천정배 최고위원이 전날인 23일 오전 국회 내 민주당 대표실에서 가진 최고위원 회의에서 한 말이었다. 당시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한의원이 문건을 보고 읽은 발언 내용은 천최고위원이 한 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한의원 개인만이 아닌 여권 전체를 겨냥해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다. 제1 야당의 대표실에서 가진 비공개 회의를 불법 도청하고, 그 녹취록을 집권 여당 의원이 야당을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면 이는 정권 차원에서 해명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문방위 간사인 김재윤 의원은 “청와대가 나서서 불법 도청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청와대가 몸통인지, 한나라당이 몸통인지, 아니면 또 다른 몸통이 있는지 철저히 밝혀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도청 의혹’ 사건의 파장은 어디까지?

▲ 민주당 이윤석 의원(왼쪽)과 오훈 변호사가 7월1일 서울 영등포경찰서에서 한선교 의원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이번 ‘도청 의혹’은 아직까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민주당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이지만, 국회의장이 반대해 현장 조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풀어야 할 의혹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한선교 의원이 공개한 문건이 민주당 최고위원회 회의 내용에 대한 녹취록이 맞는지 여부이다. 이와 관련해 한의원은 당시 의사진행 발언을 하면서 “틀림없는 발언록, 녹취록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또 “이것이 거짓이라고 하면 책임을 지겠다”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한의원이 문건을 보면서 읽은 내용이 문법에 맞지 않는 구어체로 되어 있다는 점도 녹취록일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24일 김인규 사장 나와, 최시중도 나올 테니까 최선을 다해 야당 입장을 잘 주장하고 국민에게 알리고 그 사람들에게 뭔가 얻어내려 해야 한다. 24일, 28일 날도 계속하고 28일 날은 내가 보기에 28일 날은 지금부터 잘, 민주당 사람 총 집결해야 한다’. 중언부언한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음으로 이 녹취록이 불법 도청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여부이다. 민주당측에서 직접 녹음한 회의 내용을 풀어서 만든 녹취록을 한의원이 입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둔 의혹이다. 민주당은 당시 회의에 참석한 내부 인사가 한정되어 있었고, 녹취록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며 내부 소행이 아닌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그렇다면 누가 불법 도청을 한 것인지가 의혹의 핵심으로 남는다. 사태가 불거지자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갖가지 음모론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신료 문제의 이해 당사자인 KBS 쪽으로 눈길이 모아지고 있다. 관련 증언들도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시사저널> 취재에 응한 정치권 인사들도 비록 확답은 피했지만, 대부분 KBS를 도청 당사자로 여기고 있었다.

KBS는 그동안 직접 대응을 자제했다. 6월 국회가 사실상 마무리되자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KBS는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 행위를 한 적은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회사와 기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주장과 행위에 대해 즉각 법적 대응에 착수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김인규 사장도 6월30일 열린 KBS 이사회에서 도청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다”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에도 KBS를 바라보는 의혹의 시선은 여전하다. KBS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이 아닌 다른 행위는 있었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의혹이 제기된 관련 정황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지, 좀 더 자세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손학규 대표도 공개 석상에서 도청과 관련해 KBS를 직접 언급했다. 손대표는 7월1일 열린 최고위원 회의에서 “KBS는 민주당 대표실 도청과 관련해서 성의 있게 진실을 밝히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정치권과 거대 언론의 불편한 진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 언론과 정치인의 이상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쓰는 문구이다. 둘 사이는 너무 가까우면 유착이 일어나고, 너무 멀면 취재·홍보가 제대로 안 된다. 그런 만큼 적절한 거리에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균형을 잡아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국내 언론·정치 환경에서 이를 지켜나가기는 쉽지 않다. 양측 모두 ‘불가근’보다는 ‘불가원’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도청 의혹’이 불거지면서 정치권과 거대 언론 간의 이른바 ‘권·언 유착’에 대한 우려도 되살아나고 있다. KBS 수신료 인상을 놓고 벌어진 여야 정치권의 대립과 이해 당사자인 KBS의 행태가 이같은 해묵은 논쟁을 되짚어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여당인 한나라당의 밀어붙이기에 야당인 민주당이 발목을 잡는 모양새였다. 한나라당은 ‘날치기 처리’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수신료 1천원 인상’을 통과시키려 했고, 민주당은 ‘합의 파기’라는 공세에 부딪치면서도 회의장을 점거해 물리적 저지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KBS의 ‘무리한 취재’가 논란이 되었다. 민주당은 KBS가 긴급 의원총회가 열리는 문방위 회의장에 6대의 카메라와 기자들을 대거 동원해 의원들에게 ‘겁박성 질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 민주당 원내대표실 출입문 앞에 카메라를 설치해 마치 CCTV를 설치한 것처럼 제1 야당 원내대표실을 감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KBS 국회 출입기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무차별적이고 무례하게 취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 당직자가 촬영을 못하게 막는 등 취재를 방해했다”라고 반박했다.

한나라당 소속인 전재희 문방위원장이 KBS 선임기자에게 “설득을 다 했다면서? 어떻게 설득했기에 상황이 이래요?”라고 질타한 일이 전해지면서 KBS가 수신료 인상을 위해 의원들에게 모종의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KBS는 “수신료 문제의 당사자로서 이와 관련된 국회 논의를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국회에서 수신료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한나라당·민주당 등 주요 정당의 국회의원 등과 긴밀하게 협의해왔다”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KBS와 직접 대립각을 세우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민주당 내에서는 “한나라당이 KBS에 환심을 사고, 민주당을 KBS로부터 이간시키려는 정치적 꼼수를 부리고 있다”  “KBS와 민주당의 이간계가 목적이다. 정략적으로 KBS를 이용하는 야비한 술책은 유감이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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