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트’ 하나로 암 발병 알아낸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10.05.2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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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명공학기업에서 유전자 검사용으로 개발…유전 정보로 70가지 질병 가능성 확인할 수 있어

가정주부 이수진씨(33ㆍ가명)는 올해 초 유방암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에서 유방암 유전자(BRCA1) 돌연변이가 확인되었다.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이다. 모친이 유방암 환자인 탓에 이씨는 매년 일반 유방암 검사를 받아왔지만 이상 징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씨는 앞으로 유방암 발생에 대비해 정기적인 유방암 진료를 받기로 했다.

▲ 유방암 환자가 유전자 변이 여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돌연변이 유전자를 찾아내 암을 예방하는 꿈같은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특정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일반인에 비해 크다. 이 유전자 변이를 확인하면 암을 예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30대 남성이 유전자 검사 결과에서 50대에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70%라면 의사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현재 유전자 이상 여부로 발병을 예측할 수 있는 암은 갑상선암, 신경섬유종, 망막세포종, 췌장암 등 다양하지만 유방암과 대장암이 대표적이다. 유방암 환자의 5~10%가 유전적 원인으로 암에 걸린다. 이 중 절반이 BRCA1, BRCA2라는 유전자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 가족 중에 젊은 나이에 유방암에 걸렸거나, 가족 중에 유방암이나 난소암이 생긴 사람이 두 명 이상이거나, 다발성 유방암이 있거나, 남자 유방암 환자가 있을 때에는 유전성 유방암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또, 유전자 변이로 생기는 대장암은 전체의 5~15%이다. MLH1, MSH2라는 유전자 이상이 원인이다. 가족 중에 대장암에 걸린 사람이 두 명 이상이거나, 50세 이전에 대장암으로 진단을 받은 가족이 있거나, 대장암과 자궁내막암이 발생한 가족이 있으면 유전성 대장암을 확인해보아야 한다. 대장암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용종이다. 용종은 대장에 생기는 혹의 일종인데, 일부는 암으로 발전한다. 유전자 변이로 생기는 용종이 가족성 용종이다. 이를 방치하면 40세 이후 대장암에 걸릴 확률이 거의 100%에 이른다. 특정 유전자의 변이를 확인한 후 20~30대에 꾸준하게 검사를 받으면서 용종을 발견하는 즉시 제거하면 암을 예방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유전체 정보 서비스 출시…대중화하려면 풀어야 할 숙제 많아

유전자는 암 예방뿐만 아니라 치료에도 활용된다. 이화여대 생명과학과 오구택 교수팀은 최근 암 억제 유전자를 발견했다. 이 유전자를 직장암에 걸린 쥐에 많이 주입하자 암 성장과 전이가 억제된 사실을 확인했다. 기존 치료법의 효과를 높이는 방법에도 유전자를 이용할 수 있다. 암세포 표면에서 핵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유전자(KRAS)에 이상이 생기면 항암제가 잘 듣지 않으므로 다른 치료법을 선택할 수 있다. 또, POLQ라는 유전자를 차단하면 후두암과 췌장암에 대한 방사선 치료 효과가 높아진다. 김종원 삼성서울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암과 유전력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많은 부분이 밝혀지고 있다. 앞으로 암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한 유전자 검사법이 더욱 정확해지고 신속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병원에 가지 않고도 유전자 검사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생명공학기업 패스웨이지노믹스는 최근 유전자 검사 키트를 내놓았다. 20~30달러인 이 검사 키트를 약국에서 구입해 자신의 타액을 반송 봉투에 넣어 패스웨이 지노믹스 연구실로 보내면 된다. 소비자는 이 회사 홈페이지에서 자신이 원하는 특정 유전 정보를 주문하고 그 결과를 통보받을 수 있다. 유전 정보 가격은 주문한 내용에 따라 최저 79달러에서 최고 2백49달러이다. 타액의 DNA 분석을 통해 유방암, 전립선암은 물론 심장병, 당뇨병, 류머티즘관절염 등 70가지 질병이 나타날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최근 100만원에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알아볼 수 있는 ‘개인 유전체 정보 서비스’도 선을 보였다. 인간 유전체(게놈) 연구 기업인 테라젠은 지난 3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인별 유전체 정보를 분석해주는 서비스를 인터넷을 통해 출시했다. 이 서비스는 사람마다 다른 특이 질병 유전자의 존재 빈도나 질환 요인 유전자를 찾는 것이다. 소비자는 검사 키트에 자신의 타액을 담아 검사 기관으로 보내면 6주 내에 암, 당뇨, 치매 등 50~2백개 질병의 발병을 예측할 수 있는 유전자 분석 보고서를 받아볼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임신 진단 키트처럼 암 진단 키트를 간편하게 사용하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특정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한두 개가 아니다. 유방암 유발 변이 유전자만 총 18개이다. 각 암 종류별 유전자를 발견하고 분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명승재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유전자 검사로 대장암을 진단하자는 의견은 10년 전부터 나왔다. 미국 내 최고 의료 기관 중의 하나인 메이요클리닉은 진단 키트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기존 진단법보다 월등하지 않아 흐지부지되었다. 새로운 진단법은 기존 진단법보다 우월해야 한다. 또, 특정 유전자를 찾아 분석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하고 사람에게 사용해보는 기간도 필요하다. 향후 10~15년 후에나 상용화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암에 걸린 것이 아니다.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만 확인한 것이다. 자칫 ‘유전자 이상=암’으로 여기면 삶이 하루아침에 불행해질 수 있다. 또, 암에 걸릴 가wㅈ능성이 크면 보험 가입이 거절될 수 있다. 결혼이나 취업에 불이익을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미국은 이미 유전자 차별 금지법까지 마련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유전자는 핵과 같다. 잘 쓰면 유용하지만 잘못 쓰면 폭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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