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흔든 ‘왕의 귀환’
  • 김종철 | 영화평론가 ()
  • 승인 2010.01.1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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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캐머런 감독, <타이타닉> 이어 천재성 재입증 다섯 번 결혼 등 인생 역정도 파란만장

ⓒ20세기 폭스 코리아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11개 부문을 싹쓸이한 <타이타닉>을 연출했던 제임스 캐머런은 트로피를 치켜들고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포효했다. “나는 세상의 왕이다!” 속마음은 다를지라도 예의상이라도 겸손을 떨어야 할 시상식에서, 그의 발언은 영화만큼이나 대범하고 충격적이었다. 캐머런의 오만방자한 수상 소감은 즉각 큰 이슈로 떠올랐고, 언론은 비난하는 기사로 응수했다. 그 후 캐머런은 심해로 더욱 빠져들며 2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뒤 <타이타닉> 이후 12년 만에 자신의 자리로 복귀했다. 그의 신작 <아바타>는 3D(Dimensions·차원) 입체 영화의 혁명에 가까운 기술력을 과시하며 연일 신기록을 갱신 중이다.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던 이 남자의 선언은 결코 오만한 수사도 망언도 아니었다. 캐머런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다.

1954년 8월16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카푸스카싱에서 출생한 캐머런은 부모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부친은 전기 기사였고,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했던 모친의 영향으로 미술에(우리는 <타이타닉>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누드화로 그의 실력을 확인했다) 두각을 보였다. 이후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로 이주한 캐머런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해양생물학과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영문학으로 옮겼다.

이 시기 카페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샤론 윌리엄스와 1978년 첫 번째 결혼을 시작한다. 캐머런이 영화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열다섯 살 무렵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고 직접, 우주선 모형과 16mm 카메라로 영화를 찍으면서부터다. 그 영화를 유난히 좋아해 반복적으로 감상했던 캐머런은 어쩌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성을 추구하는 큐브릭의 성격에서까지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둘의 작품은 엄연히 다르지만, 배우와 스태프를 극한까지 몰아세우는 연출 방식은 동일하다. 결혼 후 영화 세계와 잠시 멀어지고 트럭 운전을 하던 캐머런의 가슴에 다시금 불을 지른 것은 1977년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가 공개되면서다. 그 후 영화 제작 일에 전념하게 된 캐머런은 1978년 친구와 함께 35mm 단편 SF <제노제네시스>를 제작·발표한다. 이 단편을 계기로 B무비(B급 영화)의 제왕 로저 코먼의 뉴월드픽쳐스에 입사를 하고, 조 단테의 히트작 <피라냐>의 속편 감독을 맡는다.  <피라냐 2>에 대한 평가는 재앙 그 자체였다.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며 사람을 공격하는 해괴망측한 이 물고기 영화는 이후 캐머런의 눈부신 성공으로 컬트가 되었지만, 개봉 당시에는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영화였다. <피라냐 2>는 저예산의 한계와 제작진과의 의견 충돌이 낳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물이었다. 절치부심해 1984년에 발표한 저예산 SF영화 <터미네이터>의 세계적인 성공으로 캐머런은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로부터 <에이리언 2> <어비스> <터미네이터 2> <트루 라이즈> 등 작품 수는 적지만, 매번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1997년 <타이타닉>으로 작품성과 흥행성, 여기에 동시대 영화들과 비교해 한 발짝 앞서가는 경이적인 시각 효과로 영화 인생의 정점을 찍는다. 

캐머런 영화의 특징은 다양하다. 그는 기본적으로 규모가 큰 영화를 구상하고 설계하며, 치밀한 사전 준비 작업을 거쳐 완성한다. 광기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캐머런은 다른 액션영화 감독과 달리 작가주의적 면모를 과시하며 열광적인 팬층을 거느린다. 그 열기는 너무도 뜨거워 종교에 가까울 정도이다. 또한 그의 영화에는 강인한 여자 주인공이 어김없이 등장하며, 밀리터리 마니아답게 각종 총기류와 첨단 무기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대히트작 <람보 2>의 각본에 참여한 것도 밀리터리 분야에 박식한 캐머런의 능력 덕분이다.

광기에 가까운 완벽주의와 작가주의로 두터운 팬층 확보

ⓒ20세기 폭스 코리아

완벽성을 추구하는 연출 스타일과 관련한 일화로는 <타이타닉>을 찍을 당시 거대한 배 세트 방향이 원래 사실과 반대로 제작되자, 세트의 글자들을 반전시키고 찍은 뒤 마지막으로 찍은 영상을 반전시켜 사실과 같도록 편집했을 정도로 철저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화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터미네이터>의 내골격과 살인 로봇 HK. <에이리언 2>의 에이리언 퀸과 파워로더 등의 컨셉트 디자인을 직접 하기도 했다.

반면, 캐머런 영화의 단점으로 매번 스토리 구성의 평이함을 지적하는 평자들이 많다. 출세작 <터미네이터>의 경우 1963년에서 1965년 사이 방영되었던 미국 TV 시리즈 <아우터 리미츠>의 33화 <솔저>, 37화 <유리 손을 가진 악마> 에피소드를 모방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캐머런이 직접 시인한 일화가 있다. 따지고 보면 캐머런 영화들의 이야기는 늘 과거에 존재했었던 것들이다. <아바타>에 대한 혹평 역시 이런 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옛날부터 새로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력만으로 2시간 이상 관객의 흥분을 지속시킬 수는 없다. 캐머런의 영화는 늘 대중을 타깃으로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스토리는 단순 명료하다. 놀라운 것은 익히 접한 스토리일지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단 1초도 눈을 뗄 수 없는 영화로 변모한다는 사실이다. 첨단 기술을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빚어내는 탄탄한 연출력 덕분이다.

영화 연출에서는 다른 이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완벽성을 추구하는 캐머런이지만, 그의 결혼은 늘 실패를 거듭했고 여성 편력도 화려했다. 1984년 샤론 윌리엄스와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을 끝낸 캐머런은 <터미네이터> 제작에 도움을 준 게일 앤 허드와 1985년 결혼했다가 1989년에 이혼했다. 그 후 <블루 스틸> <폭풍 속으로>로 유명한 캐서린 비글로우와 1989년에 세 번째 결혼 생활에 들어가지만, 1991년에 이혼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신작 <하트 로커>가 이번 2010년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바타>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부부 감독이 최고의 자리를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일 뻔했다.

비글로우와의 이혼 후 캐머런은 <터미네이터>의 히로인 사라 코너를 연기했던 린다 해밀턴과 1997년 네 번째 결혼을 하지만, 3년을 채우지 못하고 1999년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다. 네 번의 결혼 실패를 겪었지만, 캐머런은 다시금 완벽한 결혼을 꿈꾸며 2000년 <타이타닉>에 출연했던 수지 에이미스를 다섯 번째 신부로 맞아들였다. 이혼 전력이 무색하게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고, 총 4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현재 캐머런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기록을 앞두고 있다.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인 <타이타닉>은 전세계 18억 달러의 수익으로 부동의 1위를 지켰다. <아바타>는 2010년 1월8일 현재 11억3천만 달러를 거둬들였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캐리비안의 해적 : 망자의 함> 다음이다. 현재 속도라면 <아바타>는 역대 흥행 1위까지 노려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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