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하면 항생제…‘묻지마 복용’에 세균들만 웃는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5.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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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 문제 커지면 항생제 없던 시대로 유턴”

▲ 항생제의 내성은 더 독한 항생제를 부르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시사저널 임준선

감기에 걸린 김영란씨(40·주부)는 최근 병원에서 항생제가 들어간 약을 처방받았다. 감기는 바이러스성 질환이어서 세균을 죽이는 항생제(항균제)로 치료되지 않는다. 그녀는 “감기 치료가 아니라 염증을 비롯한 합병증에 대비해 항생제를 처방했다는 설명을 의사로부터 들었다. 그렇지만 약에 대한 내성(耐性)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라며 갸우뚱했다.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인플루엔자A로 인해 내성균(耐性菌)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내성균이란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세균(bacteria)이다. 내성균을 죽이기 위해서는 더 독한 항생제를 개발해야 한다. 자신을 죽이는 항생제를 이겨내기 위해 세균도 진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웬만한 항생제로는 어림도 없는 슈퍼박테리아가 나타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항생제를 많이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전국 의원급 병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02년 감기 환자의 항생제 사용률은 74%였다. 의료 기관별 항생제 처방률을 공개한 2006년에는 54.9%로 줄어들었지만, 2007년부터 다시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57.3%를 기록했다. 감기 환자의 항생제 사용률은 미국이 43%, 네덜란드 16%, 말레이시아 26%이다. 1980년대 10% 안팎이던 세균의 내성률도 20년 만에 무려 7~8배 증가했다.

항생제 사용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는 합병증 예방에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또, 가벼운 질환에도 일단 항생제를 쓰고 보자는 무책임한 처방도 문제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이러스성 질환인 감기에 항생제를 처방하는 경우이다. 대다수 의사는 세균을 죽이는 항생제로 바이러스성 질환인 감기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감기로 약해진 기관지에 세균이 감염되어 염증 등 합병증이 동반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예방 차원에서 항생제를 처방한다.

감기 환자에게 습관처럼 처방해 문제

항생제가 감기로 인한 합병증을 예방해준다면 다행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소견이다. 이환종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1956년에 발표된 유명한 연구 결과가 있다. 감기에 걸린 2백17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한 그룹에는 항생제를 투여했고, 다른 그룹에는 위약(僞藥)을 주었다. 항생제가 합병증을 예방한다면 항생제를 투여한 그룹에서 합병증 발병률이 낮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두 그룹의 합병증 발병률은 같게 나타났다. 이런데도 의사들은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 혹시 증세가 완화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또, 자칫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아 환자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되면 곤란해질 것에 대비해서 처방하기도 한다. 항생제에 의존하는 환자도 문제이다. 강한 주사 한 대 정도는 맞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을 접할 수 있다. 모두 항생제로 인한 내성균이 얼마나 교활하고 무서운지 몰라서 하는 행동이다”라며  심각성을 강조했다.

항생물질은 현재까지 4천종 이상이 발견되었고, 이 중에서 50종 이상이 환자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항생물질의 종류로는 곰팡이로부터 추출한 페니실린제, 보통 설파제라고 부르는 세파로스포린제, 세균류로부터 추출된 마이신류가 있다.

항생제의 대표 격인 페니실린은 1929년 알렉산더 플레밍에 의해 발견되었다. 포도상구균 배양기에 발생한 푸른곰팡이 주변이 무균 상태라는 사실을 확인한 결과이다. 약물로 개발된 페니실린은 1940년대 이후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폐렴으로 고통받던 영국 처칠 총리도 페니실린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페니실린은 ‘기적의 약’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세균은 엔자임(enzyme)이라는 효소를 분비해서 세포막을 만든다. 페니실린은 엔자임과 결합해 세포막을 만들지 못하게 하며 세균의 번식을 막는다. 그런데 엔자임 구조가 변하면서 페니실린의 결합을 막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페니실린이 침투할 수 없게 진화된 세균이 나오기도 하고, 침투해도 다시 밖으로 밀어내는 세균도 발견되었다. 한마디로 항생제에 대한 내성균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세균은 서로 유전자 정보를 교환한다. A라는 세균이 항생제에 내성이 생겼다면 그 정보가 담긴 유전자를 B라는 세균에게 전달한다. 항생제에 노출된 적이 없는 B세균도 내성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4대 강에서 항생제 등 약품 성분이 검출되었다. 항생제 성분은 소, 돼지, 닭 등 가축의 질병 치료와 예방을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강에서 검출된 항생제는 소량이므로 인체에 무해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항생제는 한강의 미생물 유전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정보를 담은 유전자가 다른 세균에 옮겨지면 내성균이 생길 수 있다. 세균에 내성이 생기는 기간은 짧으면 1년에서 길게는 40년까지 걸린다. 소량이라도 항생제가 세균에게 지속적인 자극을 주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박상수 을지대학 의료공학과 교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지만 가축에 사용되는 항생제는 연간 1천t에 달한다. 강물에 있는 항생제가 소량이어서 인체에는 무해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분석이다. 장기적으로 이런 항생제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균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항생제가 세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인간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자 항생제 사용을 줄이자는 움직임이 의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3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항생제 내성 국제 심포지엄(ISAAR 2009)’에 50개국 2천명의 감염학자가 모여 항생제 내성 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항생제 사용을 자제하는 길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대로 가면 슈퍼박테리아 나올 수도 있어”

특히 우리나라는 현재 항생제 사용량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한다. 그만큼 항생제 오·남용이 심하다는 말이다. 강문원 서울성모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앞으로 내성과 항생제의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항생제에 듣지 않는 슈퍼박테리아도 나올 수 있다. 세균을 자극하는 항생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현대 의학에서 항생제는 없어서는 안 될 계륵 같은 존재이다. 항생제는 폐렴, 패혈증, 악성 종기, 감염질환, 염증 등 수많은 질환에 효과가 있다. 항생제가 없는 수술과 장기 이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아예 백신을 만들어서 항생제가 필요 없도록 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2007년 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수막염과 같은 폐렴구균성 질환은 항생제 내성이 심각한 병이다. 1998년 연간 10만명당 80명이 발생하던 환자가 백신이 개발된 2000년부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2006년부터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박테리오’는 세균, ‘파지’는 먹는다는 뜻이다. 이 바이러스는 세균에 붙어서 자신의 유전자를 세균 속으로 침투시킨다. 그 유전자는 세균 속에서 복제·증식한다. 이 과정에서 세균의 세포벽을 용해시키는 리신(lysine)이라는 효소를 분비한다. 박테리오파지가 이 효소로 세포벽을 용해해서 뚫고 나오면서 세균을 죽게 한다. 대표적인 박테리오파지인 ‘T4파지’는 대장균에 들어가 DNA를 파괴한 후 30분 내에 대장균의 세포벽을 터뜨리고 나온다. 이른바 오랑캐를 오랑캐로 무찌르는 ‘이이제이(以夷制夷)’식 치료법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슈퍼박테리아 퇴치 물질을 개발하기도 했다. 방선균이라는 미생물에서 분리한 화합물로 슈퍼박테리아 증식을 억제한다. 이원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는 “이미 동물실험에서 효능이 입증된 상태이다. 그러나 독성이 없는지, 효과는 지속되는지 등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WHO는 “현 상태로 내성 문제가 악화하면 21세기 중에 1940년 페니실린 도입 이전 시대(항생제 개발 이전 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세균을 죽이기 위한 항생제가 부메랑이 되어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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