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간지 정치’, 외출이 시작된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4.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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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서 선전한 영남 지역 친노 인사들에 고무…‘라디오 2.0’ 등 인터넷으로 ‘터’ 잡을 듯

 
“투표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총선이 있던 지난 4월9일 김해 진영여자중학교에서 투표를 마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감을 묻는 취재진에게 “별로 할 말이 없다”라며 선거와 관련한 언급을 삼갔다. 노 전 대통령은 다만 “투표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라며 투표율이 높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총선 후 행보를 놓고 갖가지 예측이 나오고 있다. 정치 일선에 복귀하느냐 여부가 주된 관심사다. 퇴임 후 고향 김해로 내려가 봉하마을 주민이 된 노 전 대통령은 그동안 현실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연일 늘어나는 방문객을 맞이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고, 틈틈이 마을 앞 개천을 청소하고 봉화산에 올라 나무를 심기도 했다.
“은퇴한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라는 한 외신 보도처럼 노 전 대통령의 귀향은 국민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임기 말 바닥으로 떨어졌던 인기는 고향 생활 이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고, 휴일이면 봉하마을 입구가 주차장으로 변할 만큼 노 전 대통령을 만나보기 위한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퇴임 이후에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밝혀온 만큼 국민적 인기가 높은 시기에 정치 활동을 재개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어왔다.
4·9 총선 결과는 퇴임 대통령의 정치 행보를 재촉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살고 있는 김해 을에서 최철국 의원이, 인근의 부산 사하 을에서 조경태 의원이 통합민주당 간판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 기간 ‘노무현 마케팅’으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본 최의원은 그 여세를 몰아 막판 역전승을 일구어냈고, 16대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의 정책보좌역으로 정계에 입문한 조의원도 한나라당 텃밭인 부산 지역에 터전을 다졌다.
비록 고배를 마셨지만 남해·하동에 출마한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장관도 선전했다.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김 전 장관은 한나라당 여상규 당선자에 1만여 표 차이로 뒤졌지만 개표 중간 엎치락뒤치락 접전을 펼쳤다. 대구 수성 을에 출마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예상보다 높은 32.59%의 득표율을 올렸다. 한나라당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 대변인을 맡았던 주호영 의원을 상대로 올린 성과로, 유 전 장관이 대구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평가가 많다.
 

외신 “은퇴한 대통령으로서 새 길 열었다” 보도

이와 같은 영남 지역 친노(親盧) 인사들의 선전이 노 전 대통령의 정치 복귀를 서둘러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 지형의 변화를 가져올 ‘물밑 작업’도 가시화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유시민 전 장관은 총선을 이틀 앞두고 가진 평화방송 인터뷰에서 신당 창당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 전 장관은 “온건 진보 성향의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총선 후에 천천히 시간을 두고 추진해나갈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친노 신당 창당은 열린우리당이 문을 닫을 무렵부터 제기되었다. 노 전 대통령의 퇴임을 전후해 잠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정당 창당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유시민 전 장관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한 이 전 총리는 “총선이 끝나면 유연한 진보 노선을 가진 ‘좋은 정당’을 만드는 일에 함께해나가겠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신당 창당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창당 논의는 ‘총선 이후’로 늦추어졌다. 이 전 총리의 탈당이 생각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한 것도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창당 논의에 참여한 한 인사는 “지금도 ‘좋은 정당’ 창당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당장 추진하기에는 동력이 약하다는 지적이 많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친노 진영은 신당 창당에 앞서 여건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부터 일구어야 한다’라는 판단에서다. 이해찬 전 총리측은 신당 창당을 준비했던 지지 모임 ‘광장’을 연구재단으로 꾸려 친노 진영의 이론적 토대와 담론 형성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 이 전 총리가 최근 중국 대장정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신당 창당 논의는 당분간 수면 아래로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장 정치 활동을 재개하기보다는 친노 진영의 활동 폭을 넓힐 수 있는 간접 지원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높아진 인기와 관심 속에서 지지 세력을 다시 모으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 친노 인사는 “노 전 대통령과 이 전 총리가 이 부분에 대해 교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창 구축 중인 웹사이트 ‘민주주의 2.0’이 노 전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새로운 공간이 될 전망이다. 노 전 대통령은 직접 기획을 맡은 이 사이트를 통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를 제시한 후 쌍방향 토론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노 전 대통령은 ‘노공이산’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을 본 딴 이름이다. 첫 번째 토론에서는 시민 주권과 관련한 의제를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부터 시민주권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친노 외곽 진영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고향’인 노사모는 사무실을 봉하마을로 옮겼다. 노 전 대통령의 사저 입구에 위치한 농기구 창고를 사무실로 개조했다고 한다. ‘노무현 라디오’로 시작한 인터넷 방송국 ‘라디오21’은 조직을 재정비해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15년 동안 맡았던 이기명 회장이 회사를 총괄 책임지고, 노사모 대표를 지낸 노혜경 전 대통령비서관도 이사로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하는 이벤트도 펼쳤다. 노사모 회원과 라디오21 청취자 5백여 명은 4월12일 봉하마을로 내려가 ‘장군차 나무 심기’ 행사를 가졌다. 노 전 대통령도 이 자리에 참석해 나무를 심고 식사도 함께 하기로 비서실과 협의가 되었다고 한다. 이기명 회장이 쓴 시가 담긴 병풍 선물도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다.
‘민주주의 2.0’과 친노 성향의 인터넷 매체들이 결합하는 계획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라디오21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대화에 참여하는 ‘민주주의 2.0’과 서비스를 연동시킬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서프라이즈 등 다른 사이트들도 참여가 가능하다고 한다. ‘민주주의 2.0’ 개설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구심으로 한 대규모의 인터넷 진지가 구축되는 셈이다.
퇴임 이후 거의 하루도 쉬지 못했다는 노 전 대통령은 4월14일부터 닷새간 봉하마을을 잠시 떠나 휴가를 갖는다. ‘인터넷 대통령’으로 불렸던 노 전 대통령은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후 본격적인 ‘인터넷 행보’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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