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언젠가 왔었어”
  • 정찬호 (마음누리신경정신과 원장) ()
  • 승인 2007.06.2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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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현상은 해마의 '치아 이랑' 이상 탓에 생겨

 
중학교 3학년생인 ㄱ군은 시험이 끝난 해방감에 젖어 친구들과 서울 강남에 있는 대형 컴플렉스에 놀러 갔다. 이것저것 값싸게 파는 푸드코트에서 떡볶이 등을 주문해 막 먹으려고 하는 순간, ‘어? 여긴 어렸을 때 와본 것 같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소름이 돋는 듯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인 것만은 분명했다. 옆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겸연쩍었다. 왜 옛날에 와본 곳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정신을 가다듬고 옆에 앉아 있는 단짝 ㄴ에게 물었다. “야, 전에 우리 여기서 밥 먹은 적 있냐?” 돌아오는 대답은 뻔했다. “아니.”
그런데 ㄴ과 함께 이 장소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기억이 생생하다. 참으로 묘하다는 느낌 때문에 먹는 동안, 아니 그날 내내 그 생각에만 몰두했다.
30대 회사원 ㄷ씨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주말 드라이브를 떠났다. 그날은 자주 다니던 춘천 쪽이나 태안반도 쪽이 아닌 강화도에 펜션을 예약하고 출발했다. 초행길이라 몇 번씩 펜션 주인과 휴대전화로 통화하며 길을 찾아 갔다.
그런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언젠가 와본 곳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안내해준 방 역시 언젠가 와본 바로 그 방이었다. 마치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가 “여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하고 물었지만 ㄷ씨는 “아니, 그냥”이라며 얼버무렸다. 묘한 느낌을 설명하기도 쉽지 않고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이해해줄까 하는 생각에 그냥 넘겨버린 것이다.
ㄱ군이나 ㄷ씨와 같은 경험은 우리들 중에서도 흔히 있다. 처음 가는 길인데 언젠가 지나가본 듯한 느낌, 처음 들어간 가게인데 옛날에 와본 곳과 똑같은 느낌, 전셋집을 얻으려 노크하고 들어가보니 전에 살던 집과 너무나 똑같다는 생각,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가 예견되는 현상 등등.
이런 현상을 신경정신과 용어로 ‘데자뷰(deja vu; 기시감(旣視感)’라고 한다.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라는 뜻이다.
앞서 열거한 사례들처럼 최초의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이다. 살다 보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나 경험하는 주변 환경을 마치 이전에 체험한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때로는 꿈속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남녀 공히 30~96%에서 한 번 또는 그 이상 이런 현상을 체험한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 이 글을 쓰고, 또 심한 데자뷰 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를 치료하는 필자 자신도 10대 시절에는 이런 현상을 자주 느끼곤 했다.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그만큼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초능력 현상에 관심이 많았던 에밀 보아록(1851~1917)이다. 그는 이를 인간이 가진 하나의 초능력으로 생각했다. 즉 전생·천리안 등 초신비적 현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영화 등에서도 자주 다루어지면서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현상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데자뷰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나와 있다. 과거에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었으나 대충 넘어갔다가 지금에서야 알아차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이론이 있다. 즉, 최초에는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지 않아 완벽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어정쩡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다시 그곳에 가면서 ‘어? 여기 언젠가 와본 것 같다’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뇌와 시신경의 불일치가 데자뷰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사람마다 두 눈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 정보가 뇌까지 입력되는 데 걸리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앞서 든 예 가운데 ㄷ씨의 경우를 설명해보자. ㄷ씨가 펜션이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왼쪽 눈으로 들어온 펜션의 모습이 먼저 뇌에 도달하고 그후에 오른쪽 눈으로 본 펜션의 모습이 뒤늦게 도달하면서 순간적으로 왼쪽 눈은 과거, 오른쪽 눈은 현재처럼 느껴지면서 데자뷰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학설은 와일더 펜필드가 1995년에 실험한 결과이다. 그는 측두엽에 전기 자극을 주는 실험을 통해 피험자의 8%가 “묘한 기억을 경험했다”라는 반응을 얻어냈다.
실제 신경정신과 교과서에 실려 있는 데자뷰에 대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기억의 메커니즘 가운데 ‘재생의 장애’로 분류되어 있다. 일반인의 경우 피로하거나 약물에 중독되었을 때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펜필드의 연구와 비교적 일치하는 점은 측두엽 간질 환자에서 빈발한다고 한다. 또한 기타 정신병적 상태에서도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미국 MIT 연구팀이 데자뷰의 비밀 밝혀내
어찌되었거나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의 이상이라는 것은 추정 가능하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신경학과 연구팀은 “인간의 기억을 주관하는 해마 부위 중에서도 치아 이랑(dentate gyrus)의 기능 이상이 생기면 데자뷰 현상이 발생한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 대학 도네가와 스스무 교수 등 연구진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중에서도 ‘해마 치아 이랑’이라는 작은 부위가 ‘삽화적 기억’, 즉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을 구별하는 기억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로써 데자뷰 현상이 뇌의 어느 부위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어째서 고령자와 뇌질환 환자에게서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지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해마 치아 이랑 기능이 손상된 생쥐들을 키우면서 이들이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두 상황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도네가와 교수는, 생쥐는 보통 두 개의 상황을 분명히 구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해마 치아 이랑이 없는 쥐들은 상황을 뒤섞어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는 데자뷰란 두뇌가 두 개의 매우 흡사한 상황 사이에서 차이를 구별하려고 애쓸 때 일어나는 기억상의 문제라면서 나이가 들수록 이와 비슷한 혼란이 자주 생기고 알츠하이머 같은 뇌 질환을 겪는 사람에게도 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해마와 데자뷰의 상관 관계는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해마 중에서 데자뷰가 발생하는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는 점은 이 연구팀의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데자뷰 현상과는 반대로 ‘자메뷰’(jamais vu; 미시체험(未視體驗)라는 것도 있다. 평소 익숙한 주위 환경이 갑자기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감각으로 이전에는 전혀 본 일이 없다고 느끼는 착각이다. 예를 들어 매일 출근하는 회사 사무실 자기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처음 온 곳 같고 주변 동료들도 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누군가가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머리를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 정신 세계의 비밀을 푸는 뇌과학은 진일보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그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을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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