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V에 힘내고, 둘리에 웃고
  • 최만수 프리랜서 기자 ()
  • 승인 2007.06.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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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로 본 한국만화 발자취/1980년대 중흥기 맞아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 브이.”
‘태권V’(왼쪽 사진)가 부활했다. 지난 1월18일, 31년 만에 복원된 <로보트 태권V>가 전국 1백75개 극장에서 개봉했다.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창고에서 복사본이 발견되어 기적적으로 복원된 것이다. 30년 전 극장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던 아이들은 이제 부모가 되어 자녀들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아들과 함께 극장을 찾은 직장인 이동호씨(41)는 “화려한 그래픽의 컴퓨터 게임에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이 보기에는 유치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로보트 태권V>는 아이들의 밤잠을 설치게 한 만화였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부활한 <태권V>는 최단 기간 최다 관객(70만명)을 동원해 한국 만화의 역사를 다시 썼다. 남산에 있는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에서는 추억의 만화 주인공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옛 KBS 건물을 리모델링한 이곳에서는 1년 내내 만화와 관련된 행사가 열린다. 추억의 만화들을 열람하거나 캐릭터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할 수도 있다.
특이하게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절반 이상이 성인들이다. 1980년대 인기 만화영화 <우뢰매>를 잊지 못하는 성인 마니아들은 <우뢰매> 사이트(www.wooroemae.com)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은 어린 시절부터 소중히 간직해온 소장품들을 공개하고 커뮤니티를 통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만화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사는 성인들이 많다. 옛 시절로 되돌아갈수록 인기 만화의 위력은 대단하기만 했다. 요즘처럼 다양한 엔터테인먼트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만화의 궤적을 시대별로 살펴보았다.
1950년대: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던 시절, 만화는 국민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1952년 김용환 화백의 <코주부 삼국지>가 월간 <학원>에 연재를 시작했다. 1955년에는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이 탄생했다. <고바우 영감>은 40여 년을 이어 그때그때 한국의 시대상을 그려냈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어린이를 위한 만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김경언의 <칠성이 시리즈>, 박기준의 <두동이 시리즈> 정도였다.
1960년대:어린이를 위한 만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1961년 한국 만화영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개미와 베짱이>가 탄생한 데 이어 1969년 용우수 감독의 <홍길동 장군>이 개봉되었다. 1964년에는 박기정의 만화 <도전자>가 총 40권으로 발간되었다. 박기정씨는 1968년 한국아동만화가협회를 결성했다. 1960년대는 만화 산업에 기초 인프라가 갖춰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만화 전문 출판사와 월간 만화 잡지가 이 시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TV 만화는 제작 기술이 없던 때여서 TBC(동양방송)에서 <요괴인간>을 방송한 이래 일본 만화영화를 수입해 우리말로 더빙한 후 방송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1970년대: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 아래에서 만화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반공 교육이 실시되던 시절, 만화영화에도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다. 전세환 감독의 <간첩 잡는 똘이 장군>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문에 실리는 4컷 만화와 만평들도 검열을 당하곤 했다. 1976년에 이르러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V>가 개봉되었다. 그해 <태권V>는 18만명을 동원해 영화 흥행 순위 2위에 올랐다. 일본 만화를 표절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당시의 열악한 상황에서 국산 만화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1980년대:컬러 TV의 등장은 만화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성인층에서 프로야구 붐이, 아이들 사이에서는 만화영화 붐이 일었다. 1987년 MBC에서 <달려라 호돌이>가 국내에서 최초 제작된 TV 만화영화로 전파를 탔다. 같은 해 KBS에서 이현세 원작의 <떠돌이 까치>, 김수정 원작의 <아기공룡 둘리>가 방송되었다. 까치와 둘리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아이들의 학용품·완구 등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일본 만화 일색이던 TV 방송에 국산 만화가 선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만화책 시장에서도 국산 만화는 중흥기를 맞았다. 1981년 만화 전문지 <보물섬>이 창간되었다. 1983년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1986년 ‘순정 만화의 역사를 다시 썼다’라고 평가받는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연재를 시작했다. 1987년 허영만의 <오! 한강>은 운동권의 필독서로 꼽혔다. 1987년 6·29 선언에 따른 언론 자유화에 힘입어  만화 전문 잡지 시대가 본격 개막되었다. 서울문화사의 <아이큐점프>를 비롯해 <영코믹스> <만화투데이> <빅펀치> 등이 연이어 창간되었다.
1990년대: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일본 문화가 밀어닥치면서 국산 만화가 위기를 맞았다. 일본 만화 <드래곤 볼> <슬램덩크>가 만화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 만화들의 인기는 1990년대 중반 연재가 끝난 후에도 식을 줄 몰랐다. TV 쪽에서는 1980년대의 인기를 이어받아 여전히 국산 만화들이 강세를 이어갔다.  배금택 원작의 <영심이>, 배추도사 무도사가 등장했던 <옛날 옛적에>, <머털도사와 108요괴> 등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산 TV 만화는 다시 일본 만화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도 만화 전문 잡지는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일본 만화에 기세가 눌리면서도 박산하의 <진짜 사나이>, 임재원의 <짱>, 전극진의 <열혈강호>,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 등이 좋은 반응을 얻어 한국 만화의 저력을 이어갔다.
 
2000년대:
TV 만화는 <피카츄> 등 외국 만화들로 더욱 다양해졌다. 극장 개봉 만화영화들은 대부분 실패를 맛보았으며 만화책 시장도 침체기를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30년 전 추억의 만화였던 <로보트 태권V>가 관객 70만명을 동원한 것은 한국 만화사에서 의미가 크다. 추억의 만화들은 색이 바랬지만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숨 쉬고 있다.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까치가 엄지에게 했던 명대사이다. 여기에 음까지 붙여서 흥얼거릴 수 있다면 당신은 ‘올드 만화 마니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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