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비엔날레의 우울한 두 가지 현실
  • 반이정(미술 평론가 · dogstylist.com) ()
  • 승인 2006.11.0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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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식상한 주제·관객의 거부감 여전

 
비엔날레(Biennale)란 격년제 행사 일반을 지칭할 때 쓰이는 이탈리아 단어지만, 대체로 국제적 규모의 격년제 미술 행사에 국한되어 사용되며, 지구촌 미술계가 놓여 있는 현재 시간을 일러주는 미학적 시계와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해서 당대를 호령하는 전세계의 거장은 비엔날레라는 구심점을 통해 한자리에 모여 경합도 벌이며, 또는 국제박람회의 역할마냥 국가별 대표 선수들의 최신 경향이 소개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참조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흔히 보통명사 비엔날레와 의심 없이 동의어로 간주되는 가장 오래된 베니스 비엔날레의 역사는 1895년부터 쓰여졌으니, 오늘날 비엔날레의 또 다른 강국임을 자부하는 대한민국은 이에 비해 무려 100년 뒤진 출발점을 갖는 셈이다(1회 광주 비엔날레가 1995년 개최되었으므로).

비엔날레, 대중성·전문성 만족시켜야 성공

극동아시아 태생 후발 주자로서는 이 시간적 간극이 몹시 조바심이 났던지 그 무렵 나온 언론 보도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관람 인원 최고치가 1백만명인 데 반해 61일간 성대하게 치러진 지방도시 광주의 관람 인원은 무려 1백63만명에 이를 뿐 아니라 광주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도 7백88억원으로 추산된다며 들뜬 분위기를 감격에 젖어 전했다. 이렇듯 축제 분위기에서 출발한 국내 미술 비엔날레의 짧은 역사가 이제 겨우 10년을 넘겼고 격년제를 표방하며 ‘너도 나도 비엔날레로’ 가운데서 그럭저럭 인정받는 광주·부산·서울이라는 대도시를 거점으로 3대 ‘비엔날레 회사’가 한반도에서 가동 중이다.

짝수 해인 올해에도 어김없이 지난 9월 1주일 격차로 광주와 부산에서 개막식을 거행했고, 서울 역시 지난 10월 말 그 뒤를 이었다. 행사 개수로는 원년인 1995년에 비해 3배로 증가할 만큼 비엔날레는 양적으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전국에서 3연발된 이 대형 축제가 좁디좁은 한반도에 감동의 울림을 주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제 비엔날레 하면 대한민국 3대 도시가 가세한 정규적인 미술계 행사로만 이해되는 분위기인가?

비엔날레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뉜다. 주제가 출품작들을 통해 온전히 구현되었는가 만족스러운 관객 동원 성과를 충족 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행사의 결과가 구체적인 실적으로 제시되는 관 주도형 미술 기획전에서, 현대미술의 존립은 이렇듯 대중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포획해야만 하는 딜레마와 마주해야 한다.

현장 미술계와 하등 관계가 없는 영화감독 이준익과 방송인 박정숙을 표지 모델로 내세워 대중 인지도에 호소한 2006 부산비엔날레 바다 미술제 도록 컨셉트는 그와 같은 고충이 반영된 것이다. 부산비엔날레의 전체 주제가 ‘어디서나’로 잡힌 점과 현대미술제의 개별 전시 프로젝트가 ‘만인을 위한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 for Everyone)’을 뜻하는 약어 ‘CAFE’로 명명된 이유도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것이다.

 
그렇지만 비엔날레를 가동하는 행정사무 팀의 인적 구성을 제하면 철두철미하게 미술인이 기획하고 출품하는 속성임을 감안할 때, 미술계 내부에서 비엔날레를 대하는 태도는 세간의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단지 미학적 현재 시간 점검과 같은 지고지순한 단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업계의 처지에서 비엔날레 참여 경력이야말로 화단의 주도권이 달린 헤게모니 재구성과 연관이 크다. 즉 주제를 완성도 있게 마감해줄 출품 작가와 그들을 선정하는 기획자의 연대로 비엔날레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보지만, 설령 실패했다손 쳐도 기획자와 출품자의 처지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 비엔날레라는 공식 만찬장을 통해 기획자와 (그가 낙점한) 출품 작가 사이에는 강한 인적 유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기도 하지만 나쁘기도 하다. 고만고만한 작가들의 난립은 이런 데서 비롯된다. 한편 매회 비엔날레 개최를 전후로 언론들이 전문가의 입을 빌려 쏟아내는, 실험성과 비전이 부족했다느니, 제1세계 비엔날레에 비해 차별성이 결여되었느니 하는 비판 기사의 본질은 기왕에 주제 고갈로 동어 반복의 루프를 헤어나지 못하는 미술계의 현주소를 창백하게 ‘반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 혹은 그 반복에 이미 관객과 미술 종사자 모두가 숙달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엔날레 신선도, 국제적으로도 이미 떨어져

미술인의 상황에서 진솔히 고백하자면 백 단위의 출품 작가가 간여하는 이같은 대형 기획전에서 하나의 주제로 선명하게 수렴시키는 연출력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해서 기획안이 전시 공간에 제대로 구현되었는가를 두고 공방을 벌이는 것은 마땅히 제기해야 할 문제임에도 달리 해법이 없다는 것을 비판자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비엔날레의 주제가 안고 있는 난센스는 이뿐만이 아니다. 문제는 이미 동이 나버려 신선도가 떨어지는 비엔날레를 굳이 한반도의 3개 대도시에서 격년에 몇 주 간격으로 구경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열풍변주곡>이라는 제목으로 올해 광주가 택한 테마는 동아시아의 정체성이다. 부산은 <두 도시 이야기: 부산-서울/서울-부산>을 들고 나와 제3세계 근대화가 안고 있는 병폐를 취급했다. 서울은 <두 개의 현실>이라는 테마로 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작금의 풍경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고만고만한 주제들은 미술판에서는 너무 자주 반복되어서 식상한 것들이다. 주제 선정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회과학이 다루는 주제는 현대미술의 요긴한 메뉴들이다. 미학자 단토(Danto)는 현대미술의 위기를 서사의 기능이 철학에 이양된 정황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같은 해석과는 달리 작금에 우리가 만나는 현대미술은 철학보다 진중한 담론으로 중무장한 채 관객을 맞는다.

재일 조선인 학자 서경식은, 바그너가 오페라 <파르지팔>의 단조로운 스토리를 무려 3막 5시간짜리로 만든 것에 대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라면서 이 지루한 구성이 끝내 감동으로 이어지는 역설은 장시간 감상의 피로와 감각 마비가 관객의 감성에 도취감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낭만주의 미학에 가려진 독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다분히 정치적 감동을 조장한다는 점을 염려한 것이다. 국내 비엔날레의 본질은 단조로운 주제를 지루하게 견인하고 감상의 피로를 동반한다는 데까지는 동일하지만, 그것이 도취로 이어지기보다는 거부감의 재확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 비엔날레의 양적 팽창에도 미술인과 비미술인 간의 공감이 좁혀지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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