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를 찾자"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89.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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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法개정 둘러싸고 女性界 · 儒林측 첨예 대립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계의 운동이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있다. 특히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4당이 모두 가족법개정을 對여성 유권자공약 제1호로 내걸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여성계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문자 그대로 총력전을 펴고 있다.

 현재 가족법개정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단체는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연합’과 ‘가족법개정특별위원회’ 前者는 李兌榮씨를 주축으로 84년에 여성단체와 일반단체 88개가 모인 것이고, 後者는 기층여성운동 중심체인 여성단체연합과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연합한 신진세력, 여기에 여성국회의원들까지 超黨的으로 힘을 모으고 있고, 유일한 여성장관인 金榮禎씨도 적극 지지를 표명하고 있어 여성계의 가족법개정안 통과에 대한 열망은 사뭇 비장한 감마저 든다.

 현재 가족법개정안은 올 2월에 열렸던 제45회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1백53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돼 제안설명과 질의응답까지 마치고 법사위에 계류중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절반이 넘는 1백53명이 제안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법개정안 통과에 여성계가 다시금 목이 메이는 것은 그동안 가족법개정운동이 그만큼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가족법개정운동 현황

 1958년 2월에 제정 공포, 1960년부터 시행되어 온 가족법은 민법 중 친족상속편을 말한다. 그러나 이 법조항들은 일본의 천황제적 가족국가론에 입각한 호주제도를 답습, 제정 당시부터 남녀평등과 인권에 배치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게다가 이 법의 종주국인 일본에서 조차 1947년에 부부를 중심으로 한 내용으로 이미 법이 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가부장적 사고와 맞물리면서 큰 수정 없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가족법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물론 그동안 2차례에 걸친 개정(1962, 1978년)으로 자녀의 법정분가제와 분명하지 않은 재산은 부부의 공동소유로 추정하는 조항이 신설됐고, 동성동본자의 혼인신고와 그 자녀에 대한 입적신고를 1년간 시한부로 인정한 ‘혼인에 관한 특례법’(1978, 1988년)이 시행되긴 했다. 그러나 호주상속과 이혼시의 경제권 등 가족법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는 제쳐둔 부분적인 개정에 그쳐 가족법은 여전히 여성이 불이익을 받는 악법으로 남아 있다는 게 여성계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가족법의 본질적인 문제는 그동안 왜 개정되지 못했는가?

 여성의원들 가운데 이 문제에 가장 앞장선다는 평을 듣는 朴英淑의원(평민 · 부총재)은 그 이유가 ‘전략부재’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11, 12대국회에서는 흐지부지 상정조차 좌절되었는데 특히 12대 때에는 對국민 여론작업이 선거를 앞두고 이뤄져 오히려 儒林을 자극, 역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남성의원으로서 지난 10월3일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열린 가족법대토론회에서 해박한 가족법 지식으로 참석자의 박수를 받았던 金光一의원(민주)은 “민법에 대한 법사위의 소극적 태도도 중대한 요인” 이라고 분석한다. 대부분의 법사위원들은 가족법이 개정되면 현재의 가족제도가 무너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법사위 소속 16명의 의원에게 가족법개정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여성단체가 법사위원장은 물론 4당간사에게 전화, 편지, 방문 등을 통해 설득공세에 나설 것을 金의원은 진지하게 권한다.

 그런가 하면, 일부 여성들의 불완전한 여성의식이 가족법개정의 저해요인이라는 반성도 있다. 여성개발원 權英子부원장은 “현재 우리나라의 여성은 두개의 가치관에 매여 있다”고 말한다. 딸과 며느리를 다른 시각에서 보는 시어머니처럼, 한국여성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인격체이자 가부장제도하에서의 현모양처”라는 이율배반적 객체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사회전체의 의식변화’가 수반 되어야 한다고 가족법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 韓明淑위원장은 주장한다. 핵가족시대에 접어든 지금에는 가치관의 근대화로 인해 이미 젊은 부부 사이에는 재산을 공동명의로 하는 등의 실질적인 가정의 민주화가 실현되고 있어 이같은 현실이 전체적 분위기를 이끌어 가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법의 특성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도구의 하나라는 게 통설이라 하더라도 가족법같은 私法은 사회의식 변혁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같은 “사회적 분위기 성숙” 에 가장 드러나게 반발을 하는 집단이 儒林측이다. 현재 유림을 약 1천만명으로 추산하는 성균관 李重基사무처장은 “지난 86년에도 가족법문제로 국회의사당 앞에 10만 유림이 모였었다” 면서 “이번에 통과되면 국회로 쳐들어 갈 것”이라며 은근히 勢를 과시한다. 그러나 또 국회의원은 많은 국회의원들이 가족법문제에 명백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를 유림측의 영향력은 의식했다기보다는 “유림의 표를 핑계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실토한다.

 

가족법개정은 인권문제

 가족법은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여자에 대한 상속비율이 적다고

소송을 제기하는 여성도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했을 때, 혹은 어떤 이유에서건 가정이 파괴될 지경에 이를 때 여성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법적으로 여성은 너무 불리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친권을 끝까지 주장할 경우 자녀들은 모두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 혹 在家라도 할 경우에는 전남편과 함께 모은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을 수도 없다. 의도적이건 다른 이유에서건 그동안 함께 모은 재산이 남의 명의로 돼있으면 위자료도 받을 수 없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흔한 일이 위자료 조정문제다. 실례로, 남편에게 젊은 애인이 생겨서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최고 명문대의 某교수는 “알몸으로 길거리에 내던져지는 듯한 한국식 법은 따를 수 없다” 면서 10년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버틴 일이 있었다. 동정은커녕 오히려 지독한 여자라는 평판만을 들어가면서 말이다.

 동성동본으로 인해 혼인신고를 못한 채 살아가다가 정부의 限時法에 의해 결혼 8년만인 지난 88년에 혼인신고를 마친 金云植씨. 그는 그간의 생활을 “영수증 없는 삶의 아픔이었다”고 회상하며 동성동본결혼이 정부의 한시법에 의한 것이 아닌 합법적인 결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구보건원 허정씨도 “의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8촌만 넘으면 우생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면서 유림측의 우생학적 불혼 운운은 설득력 없는 억지라고 말한다.

 사실 일본의 가족법이 1947년 민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에서 家 · 호주권 · 가족상속권을 모두 폐지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965년 부부재산법과 1975년 이혼법개정에서 부부의 가족에 대한 공동지도원리를 선언했다. 서독에서는 1976년 가족법상 兩性평등에 반하는 모든 규정이 폐지되었고, 영국에서도 1975년 성차별금지법이 생기는 등 세계의 현대문명국의 가족법에서는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의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30년 넘게 이 운동을 벌여온 한국가정법률상담소 李兌榮소장은 이미 여성지 등에의 기고를 통해 “만약 이번에도 통과되지 않을 경우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는 마지막 카드로 으름장을 놓은 바 있다.

 90년대를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헌법에 위반되는 성차별적인 가족법은 개정되어 야 한다는 게 여성계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화여대 崔世華교수의 말처럼, 서로 도와가는 미래의 부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남녀관계의 평등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헌법 제Ⅱ조) “혼인 및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헌법제36조)는 헌법정신에 일치하는 가족법으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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