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채권에 속터지는 사람들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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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매 제한한 8 · 12 개인 투자자 ‘날벼락’

 LG증권이 대우 채권을 편입한 머니마켓펀드(MMF)를 개인 고객에 한해 전액 한매해 주기로 결정했던 8월18일 오후. 금융감독원(금감원)실무대책반의 표정은 심드렁했따. 한 관계자는 ‘갸륵한 일’이라는, 칭찬도 비난도 아닌 야릇한 표현을 쓰며 “자업 자득이다. 평소 증권사들이 주식매매용 고객 예탁금을 MMF계좌로 묶어 유동성을 확보하려 한 결과 아니겠는가”라고 지적했다(고객 예탁금은 증권거래소가 맡아서 관리한다).

 그러나 대우의 무보증 채권을 편입한 MMF를 전액 환매하겠다는 LG증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튿날 증권사를 찾은 고객들은 ‘업계 결의’에 따라 95%만 환매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LG증권이 18일 오후 전격적으로 전액 환매를 발표하자 현대 · 삼성 · 동원증권도 바로 뒤를 이었지만, 그 직후 한국증권업협회가 소집한 회의에서 95%만 환매하기로 내용이 수정된 것이다.

 국가 금융 정책이 마치 풍랑을 만난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하루도 못되어 뒤바뀌는 현실. 이 사건을 일과성 촌극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곪을 대로 곪다가 터진 대우 채권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부가 ‘결자해지(結者解之)’ 자세로 대처해야 할 사안이다.
 
정부는 월권, 투신사는 탈법
 LG증권이 과연 지난 12일 금감원이 발표한 ‘대우 사태 투신사 수익증권 처리 방안’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독자 행보를 한 것일까. LG증권측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LG증권이 운용하는 MMF에 펴입된 대우의 무보증 채권 규모는 모두 2백50억원 정도. 고객들의 신뢰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액수는 손실을 감수할 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LG증권의 행보는 금감원의 고민을 간파하고 선수를 친 것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한 투신사 간부는 “LG증권이 전액 환매를 발표하기 전날, 금감원으로부터 개인이가입한 MMF에 한해 환매를 허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었다.”라고 밝혔다.

 지난12일 금감원은 무보증 대우 채권이 편입된 공사채형 수익증권(MMF포함) 및 주식형 수익증권에 대해서 90일이 되기 전에 환매를 요구할 경우에는 기준 가액(원리금)의 50%, 180일 이전에는 80%, 180일이 경과한 뒤에는 95%를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날벼락을 맞은 개인 고객들의 항의가 빟발쳤지만, 금감원은 예외를 허용할 수 없다고 버텼다. MMF 33조원, 단기 공사채형 87조원 등 단기 상품에 전체 공사채형 수익증권의 절반에 육박하는 1백10조원이 들어가 있다. 그런 판국에 단기 상품이라고 예외를 인정하면 환매 연기 조처가 효과를 상실할 것이라는 시각에서였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재산권을 압류당한 개인 고객들의 분노를 모른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익증권은 실적 배당에 따라 손실을 볼 수도 있는 금융 상품이기는 하다. 여기에 돈을 맡긴 고객은 ‘예금주’가 아니라 엄연히 ‘투자자’인 것이다. 하지만 투자한다고 생각하면서 MMF나 수익증권은 우량한 채권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손해를 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답변을 듣는다. 고객들은 그 말을 믿고 아파트 중도금이나 전세 자금 같은 중요한 목돈을 MMF나 수익증권에 주저 없이 맡겼던 것이다.

 참여연대 인터넷 홈페이지(www.pspd.org)에 접수된 피해 사례들만 살펴보아도, 투신사들이 개인 투자자들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게 된다. 한 피해자는 8월9일 1주일 정도 맡겨둘 요량으로 증권사 신종 MMF상품에 가입했다가 8 · 12조처를 당했다. 그런데 그가 증권사에 알아 보니 무보증 대우 채권이 MMF 편입 비율이ㅣ 60%에 달했다.

 이미 대우 전 계열사의 채권이 지난 5월 이후 투자 부적격으로 떨어진 상황이어서 명백한 탈법이었다. 지난해 시판된 신종 MMF에는 투자 부적격 등급(BB+ 이하)이 매겨진 채권을 편입시킬 수 없게 되어 있다. 사태가 불거진 뒤 증권사나 투신사 들이 고객앞에 신탁운용명세서를 내놓기 꺼리는 것도 그래서이다. 나중에 고객이 명세서를 근거로 하여 소송을 벌이면 꼼짝없이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이다.

 8 · 12 조처는 형식적으로는 투자신탁협회와 한국증권업협회가 공동으로 자율 결의해 건의한 방안을 금감원이 승인해 발표한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금감원이 업계의 ‘옆구리를 찔러서’나온 대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계자들은 없다. 그 때문에 업계는 자신들이 방안을 내놓고도 개인 고객들에게는 환매를 허용해 줄 것으로 금가원에 줄기차게 요구했던 것이다. 법적인 약점 때문에 애당초 고수할 수 없었던 자율 결의인 셈이다.

 투신 업계는 화살을 정부에게 돌린다. 한마디로 정부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이다. 한 투신사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우리는 얼마든지 대우 채권을 팔아버리거나 돌려보낼(원리금을 상환할)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금감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가뜩이나 경제가 살얼음처럼 위태로운데 대우 문제가 폭발해 보라. 우리가 협조하지 않았다면 IMF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금융 당국의 장단에 춤을 춘 투신사 역시 책임을 면할 길이 없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대우 채권 사태, 진상 공개해야
 미국계 컨설팅 전문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한 간부는 “어차피 한국의 금융산업이 제대로 정착하려면 한 3년은 걸린다. 그때까지 급하면 편법이라도 동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라도 동요하는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그는 우선 대우 채권 문제를 처리하는 창구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거의 모든 금융기관이 관계되어 있는 사태인데, 이들이 서로 손발이 안 맞으면 신뢰를 회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8 · 12 조처 이후 금융기관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환매 요구가 집중되어 투신사의 유동성이 부족해질 경우, 금감원은 한국은행이 환매조건부채권(RP)을 지원해 투신사가 보유한국 · 공채나 통화안정채권을 사들여 주도록 했다.

 그러나 한은이 투신사를 직접 지원하지 않고 중간에 시중 은행을 끼고 하는 바람에 은행이 투신사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투신사는 콜금리(4.7%)에 0.5%를 가산한 금리로 환매조건부채권을 지원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은행이 양도성예금증서(CD)금리에 0.5%를 더한 금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투신사 처지에서는 이자 부담이 2.5%나 가중된 것이다. 게다가 은행은 투신사에 국 · 공채 담보를 130%나 요구해 더욱 물의를 빚었다. 투신사는 그같은 은행의 처사에 ‘수재민 앞에서 낚시하는 꼴’이라고 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기가 지난 수익증권을 환매 받지 못한 투자자들은 불만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예정대로 2000년 7월 1일 이후 대우 채권의 손실을 정산해 손실이 발생했을 때, 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전해 줄 주체가 뚜렷하지 않아 더욱 그렇다. 먼저 상품에 가입한 사람이 나중에 가입하고도 이미 환매를 받은 사람보다 더 손해를 본다면 ‘선입 선출’ 원칙에도 어긋난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장사헝 교수(고려대 · 경영학)는 만기가 지난 수익증권도 MMF처럼 환매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방적으로 환매를 제한한 이번 조처는 초법적이다. 설사 정부의 판단이 정당했다 해도 더 큰 문제는 수익증권 투자자들이 금융기관을 신뢰할 수 없다 데 있다. 이미 법을 어긴 기관들을 믿고 기다리다가 또 손해 보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하는가. 정부는 사태의 진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대우 채권 사태는 정부가 시장원리를 무시하며 투신사의 영업 행위에 간여해 발생한 사건이다. 금감원은 공적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투신 업계에 약속하고도, 겉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시장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시장 원리를 지키지 않아 꼬인 사건을 시장 원리만 앞세워 풀려고 하면 자꾸만 지뢰밭을 걷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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