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인류의 소설 읽기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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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작가 외면 …‘포스트 모던 ’에 이끌리는 까닭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문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지난 7일 스톡홀름에서 가진 수상 기념 연설에서 “일본의 작가로서 처음으로 이 자리에 섰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과 나 ’라는 강연을 했다.  그러나 나는 존경하는 선배에게 공감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모호한 일본과 나 ’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모호함은 일본과 일본인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다 ”라고 말했다.

 일본과 일본인의 모호성은 문학 작품에 들어가면 더 심해지는 양상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문학〉 겨울호는 ‘하필 지금 왜 일본 문학인가 ’라는 주제의 좌담, 일본 현대 문학과 재일교포 문학에 대한 논문 3편, 일본 현대시의 동향 및 현대시 8인선,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 세계를 들여다보는 논문 및 신작 소설 2편 등 다양한 내용을 선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동경 대학 영문과 사토 요시아키(佐藤良明) 교수가 기고한 ‘하루키와 바나나를 통해 우리들을 읽는다는 것 ’이란 글이다.

‘시큰둥 세대 ’가 받아들인 새로운 문학
 사토 교수는 글의 도입 부분에서 ‘60년대 캠퍼스에서 오에의 신작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찻집에서 담론을 나누는 것은 적어도 문학 청년이나 정치 청년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약 10년 사이에 일변했다.  변한 것은 소설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의 의미이다.  적어도 근래 20여 년 사이의 일본 소설의 변화가 오에 겐자부로, 아베 고보(安部公房)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ぱなな)로 이행했다는 점에 주목해서 생각한다면, 작가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즉 작품 수요의 컨텍스트에 조준을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의미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사토 교수의 글에 나타난 일본적 상황을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문학 작품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선호도, 즉 ‘작품 수요의 컨텍스트 ’가 일본에서 오에 겐자부로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로 이행한 것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 시장의 변화에도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진단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조정래 · 이문열에서 장정일 · 이인화로, 김남조에서 최영미로의 이행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세대 변화가 아니라, 작품 수요의 질적 변화를 담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에로부터 무라카미로 이행한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이를 파악하는 데는 사토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 보탬이 된다.  “77년에 무라카미 류의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나오기까지 대학생 세대가 열광할 만한 소설 작품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주목할 사살이다.  그러한 문학의 공백기에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가.  매스컴이 ‘시큰둥 세대 ’라고 불렀던, 주의 주장을 무조건 싫어하고 레코드나 만화에만 빠져 있는 젊은이들은 어떤 종류의 새로운 문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가?”

 유신 체제의 마지막 시기, 체제와 반체제를 가릴 것 없이 사회의 모든 것이 경직성을 향해 달려가던 그 시대에 ‘아쿠다카와 상 수상 작품 ’이라는 상품성을 가지고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던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일부 마니아들에게 극심한 문화적 · 정서적 충격을 안겨준 채 곧 판금 조처를 당해 사라졌다.

 이 소설에 대한 사토 교수의 묘사는 다음과 같다.  “스물다섯 살 먹은 작가는 격렬한 음향의 록 뮤직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지미 헨드릭스처럼 몸을 구부리고, 사정(射精)하듯이 말을 던진다 ··· 여기에는 사회는 물론 ‘나 ’를 응시하는 시선도 없다.  육체적인 자극과 육체적인 반응이 이미지의 난무와 더불어 적혀 있을 뿐이다.”

 사회와 ‘나의 부재 ’그리고 이미지의 난무는 이른바 포스트모던을 표피적으로 지향하는 현대 한국 소설들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무라카미 류가 등장한 지 2년 후, 이번에는 30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극히 이질적이고, 약간 우수 어린 추억의 멜로디를 들고 나타난다.  사토 교수는 “하루키의 세계에서는 문학의 풍부함이 어휘와 관념의 풍부함과는 정반대되는 그 어떤 것에게 보증받게 된다.  그곳은 자신이 끼여들어 뭔가를 하거나 뭔가를 말해서는 무너져 버리는 문학 세계다 ”라고 언급한다.

“어려운 소설은 재고만 쌓일 것 ”
 동일한 성씨를 가진 류와 하루키는 마르크시즘적으로 해석하자면, 사회 · 경제적 현실에 대한 비평적인 언급을 사회적 역할로서 요구하던 문학이, 이미지 그 자체가 상품이 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개 속에서 존립 기반을 잃고 물상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사토 교수는 이에 대해 ‘음악을 중심으로 생겨난 정감의 유형(펑크, 하드 록, 헤비 메틀, 언플러그드, 뉴 에이지 등)디 영상을 불러들이고, 나아가 문학을 끌어들였다. 이전과는 성격이 판이한 문학이 탄생한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80년.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의 〈어쩐지 크리스탈〉이 드디어 나왔다.  ‘드디어 ’라는 부사가 붙는 이유는, 이 소설이 후기 자본주의 속에서 문학 물상화의 총체적 모습을 모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포스트모던한 형식으로 포스트모던한 충격을 던져준 〈어쩐지 크리스탈〉은, 내용은 여대생의 그날 그날의 소비 형태를 독백체로 읋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왼쪽 페이지마다 옷 · 카페 · 향수 · 액세서리 · 구두 · 음식점 등 소비재마다 작가의 해석을 달아 놓아, 그 주석이 하나의 소설을 구성토록 했다. 현실을 떨쳐낸 허구가 당당하게 시민권을 얻어 번성하는, 비현실의 공간글인 카페나 바에서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남녀 같은 만남이 이 소설의 분위기이다.

 〈어쩐지 크리스탈〉 이후 일본 문학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궤도를 벗어난 청룡 열차처럼 달려간다.  쓰지 젠세이의 〈피아니시모〉(1989)는 전철 플랫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샐러리맨에게 “그래, 해버려 ”라고 외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히루마 히사오의 〈예스, 예스, 예스〉(1989)는 호모의 가게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17세 소년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물론 현대 일본 문학에서 이들만이 읽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에 겐자부로가 더 이상 읽히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현재 한국에서 읽히는 그의 대표작들은 벌써 60년대 작품들이다.  이에 대해 사토 교수는 “떠들썩한 매스컴 보도에 이끌려 난생 처음 오에의 소설을 접한 학생은 이구동성으로 ‘어렵다 ’고 말한다.  출판사는 현재 서둘러서 증판하고 있지만, 이때다 하고 너무 많이 인쇄하게 되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리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바로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만화 수법을 동원한 소설로 상업적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 일본에서는 만하가가 되는 데 실패하면 소설가가 된다.  소설가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만화가다.  이런 새로운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대성공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일본은 아름다웠고,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모호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본은 과연 무엇일까. 혹, 없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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