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이면 꿰뚫은 영상 증언들
  • 강운구 (사진가) ()
  • 승인 1994.10.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 5년 사진 12선 / 앞선 기획력 . 현장감으로 기사에 활력

 우리나라 신문사 대부분은 일본 신문사들의 직제나 편성을 따르고 있으며, 신문 또한 일본식을 본받아서 만들고 있다. 그런데도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일본 문화나 자본 그리고 유행 같은 것이 이 땅에 와서 퍼지고 있는 현상을 개탄한다. 그렇더라도 혀 짧은 훈장의 ‘나는 바담풍 해도 너희는 바람풍 하라’는 우스갯소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다만 일본식의 모양만 말하고자 할뿐이다(신문의 모양새야 어떻든 하는 소리가 옳다면 그만일 수도 있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 신문의 틀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신문들은 그래서 그렇다 치더라도 신문사가 내는 주간지들마저, 대부분이 60년대 이후 창간되었으면서도 왜 그랬을까.

세련된 지면 구성 큰 몫…기획 기사에서 특히 돋보여
 주간지는 곧 ‘노랑’을 연상하게끔 되었으므로 그렇지 않는 것들은 그 머리에다 굳이 토를 달아서 말하게 되었다. ‘시사’ 주간지라고(세상일치고 시사 아닌 것이 있을까마는).

 <시사저널>도 ‘시사’ 주간지이다. 이것은 아마도 체제가 일본식이 아닌 첫 번째 주간지가 아닐까. <시사저널>은 사전을 뒤적여가며 더듬더듬 읽던, 주간지의 본디 대명사인 <타임>과 <뉴스위크>를 닮았다. 그래서 그것은 단정한 모양으로 이 땅의 현실을 요모조모 따져 세련되게 전한다. 지면이 세련되려면 물론 글도 중요하겠지만 편집과 사진이단단히 제 몫을 하여야 한다. <시사저널>의 사진들은 제 몫을 잘 해내고 있다고 보인다.

 창간 초기의 <시사저널>을 보았을 때 느낌은 ‘어, 신문하고 속보 경쟁 하자는 건가?’였다. 그러나 차츰차츰 깊이 있는 분석과 논평 그리고 돋보이는 기획 기사들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진은 기획 기사들에서 빛을 낸다.

 시사 주간지 기자는 일간 신문보다 여유를 가지고 이것저것 이미 난 기사들을 챙겨 보기도 하고 보충 취재도 하며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 기자는 일간 신문 기자와 같은 현장에서 부대끼며 같은 시간에 끝낼 수밖에 없다.

 사진은, 보도 사진의 엄격한 원칙은 마감까지 시간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거기에 덧붙이거나 빼서는 안된다. 따라서 더 깊이 있게 할 방법이 거의 없다. 이 점이 생각 있는 사진 기자들의 고민거리이다(그러나 현실은, 감히(?) 주간지 기자가 대 일간지 기자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다퉈서 <시사저널> 사진만큼 이룬 것만 해도 큰 공적에 든다).

‘인증’과 ‘표현’ 적절히 조화
 한 장의 사진만으로 한 상황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전달하기는 어렵다. 대개 한 장밖에 보여 줄수 없는 일간 신문에 견주면 주간지는 여러 장의 사진으로 편집해 한눈에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다. 이 방법으로 더 분석적이고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다. 한 사건의 여러 측면을 예상하고 파고들어 여러 장면을 잡아내는 것은 사진기를 잘 조작할 줄 아는 기술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진정한 사진 기자는 한 사건(또는 상황)을 속 깊이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각, 큰 사상이 있어야 한다.

 <시사저널>의 사진들에는 그런 깊이가 있는 것이 많았다. <시사저널>의 몇 안되는 사진 기자들은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기획 기사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사건까지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년동안 <시사저널>에 보도된 사진 중에서 비교적 비중이 컸던 사진 몇 장(필자가 선정한 것이 아님)이 이 지면에 있는데 뜯어보면 두세 장 말고는 기획력.섭외력으로 혼자 뛰어서 이뤄낸 것들이다. 말하자면 일간 신문의 뒷북이나 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따돌리고 혼자 뛴 것이다. 이 지면의 사진 대부분은 큰 화제가 되었었는데, 앞에서 쓴 것처럼 여러 장으로 구성해서 편집되었던 것들 중에서 한 장씩만 실었다.

 일반론으로 얘기하자면, 사진기자는 힘이 들어 헐떡거리거나 몸이 달 때라도 머리는 차가워야 한다. 복잡한 소용돌이 안에서도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요모조모 따져가며 잘 찍었더라도 지면에 난 결과는 그렇지 않은 수도 있다. 찍어온 사진들 중에서 한 장 또는 몇 장을 고르는 것은 이른바 데스크의 몫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뛴 기자는 데스크에게 상황 설명을 충분히 해야 하고 (그러나 대개 변명으로 통하는 수가 많다) 의견을 말해야 하며, 아무리 통찰력과 날카로운 직감을 가졌다 하더라도 데스크는 그 말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확신 없이 골랐을 때, 그리고 유기적이지 않거나 비중을 잘못 재서 크게 쓸 것과 작게 쓸 것이 뒤바뀌어 편집되었을 때의 결과는 뻔하며, 그것이 마침내 억울하게도 현장에서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뛴 사진 기자의 탓으로 돌아가는 수도 없지 않다. 일간 신문에서는 확신 없이 골랐을 때의 보기를 종종 볼 수 있다. 거기에 견주면 시사 주간지는 심사숙고할 시간이 있으므로 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은 훨씬 적다.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바뀌면서 사진이 지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졌다. 그러다 보니 마땅한 사진이 없는 기사를 크게 낼 때에도 구색을 갖추려고 사진을 쓰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따금 ‘이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 없음’이라는 설명을 달고 나가는 것이 그런 것이다. 특정 사실과 관계가 없는 것은 기사가 아니다.

 특정한 사실을 영상 그 자체로 말하는 사진이 보도 사진이다. 보도 사진이라고 해서 서투르고 거친 영상으로 내용을 전달할 특권은 없다. 보도 사진도 세련된 영상으로 되어 눈으로 잘 들어가게 하여 오래도록 머리나 가슴에서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세계적인 보도 사진의 경향은 보도 사진인지 예술 사진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아니 그 두 가지 성격을 다 갖춘 뛰어난 사진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런 사진들은 1차적으로 사실을 전달함은 물론 형언할 수 없는 느낌까지도 전한다. 보도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 <시사저널>의 사진 기자들도 그런 추세를 진작 감지하였으며, 이미 그런 결과들을 얼마쯤은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인증하는 힘은 표현하는 힘을 능가한다(열화당 발행 <카메라 루시다>)’고 간파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증거만 대는 사진은 재미가 적다. 세련되게 인증하자면 멋진 표현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시사저널>의 인증과 표현이 어우러진 사진에서 이 땅의 이 시대를 읽는 일은 즐겁다.
강운구 (사진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