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을 알고 절에 가면 역사가 보인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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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순례》 펴낸 최완수씨 “사찰은 문화재 보고”

전통 문화에 대한 지식 욕구 때문일까. 최근 출판된 사찰 문화와 관련한 책들이 뜻밖에 널리 읽히고 있다. 지난 2월 발간된 유명 사찰 현장답가기 《명찰순례》(전 3월 · 대원사)와 지난해 나온 판화집 《산벚나무 꽃피었는데…》(학고재)가 판을 거듭해 출판 당사자들조차 놀라워한다. 《산벚나무…》를 펴낸 판화가 이철수씨는 지난 1월부터 월간 《해인》에 판화 사찰 기행을 연재하고 있다(99쪽 상자 기사 참조).

 《명찰순례》 저자 최완수씨(간송미술관 연구실장)는 일반 독자와는 이 책을 통해 거의 처음 만나는 미술 사학자이다. 66년 간송미술관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10년간 공부하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을 정도로 ‘독하게’불교사 연구에 몰두해온 그는, 《불상연구》 《겸재정선진경산수화》 《그림과 글씨》 《추사집》 같은 저서와 수많은 논문을 펴내면서 전문 학계에서는 명성을 얻었지만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이 선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일반인에게 자기를 알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썼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명찰순례》는 여느 답사기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전국 56개 명찰을 순례 대상으로 삼아 사찰이 창건되기 이전 역사부터 샅샅이 훑고, 사찰에 녹아 있는 온갖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삼국시대 이후 천년 동안 국교로, 조선 5백년 동안 종속 이념으로 이어져 오면서 한국의 사찰은 문화재의 보고가 되었다. 저자는 88년 4월부터 92년 12월까지 달마다 절을 찾아다니며 《명찰순례》를 집필했다.

 “조선시대에 탄압을 받고 임진왜란 ·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경기 이남 지역의 사찰과 사적기는 거의 타버리고 인멸됐다.” 《명찰순례》에서 저자는 인멸된 사적기를 복원하는 것은 물론 남아 있는 사적기의 오류를 바로 잡기도 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교 이념이 조선화하면서 더욱 더 탄압을 받아 우수한 학승이 배출되지 않았고, 그 결과 타버린 사적기가 허술하게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수십번 가본 절이라 하더라도 《명찰순례》를 위해 반드시 현장을 답사했다고 말했다. 생명력이 있는 ‘산 글’이 되게 하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반드시 가봐야 했다. 거기서 왜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는 해답은 반드시 현장에 있었고, 역사 유물을 열 번 백번 보아도 우러나는 감회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꾸밈을 위해 답사한 사찰의 순서를 책에서 바꾸거나 하지 않았다. 답사 순서를 미리 정해 놓고 한 것도 아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절부터 찾았고 그때의 계절과 물 소리 · 새 소리 같은 자연, 그리고 사찰에서 만난 스님의 인상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개인적인 얘기를 왜 끼워넣었냐고 불평하는 독자들이 있으나, 유물처럼 변하지 않는 요소보다 그 시대 생활 모습들이 역사 기록으로서는 더 중요하다. 백년이나 2백년 뒤 그 당시의 사회를 짐작케 하는 결정적인 사료가 되기 때문이다.”

 《명찰순례》가 일반 답사기의 성격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사찰들이 깊은 소장한 유물들을 모두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로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유물을 글과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데, 각 사찰 스님들의 족보까지 두루 꿰고 있는 저자에게 그 스님들이 친견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창을 이유로 유적들이 많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우리 사찰은 아직까지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잘 지키고 있다고 저자는 본다. 그는 조선 5백년 동안 승려가 천민으로 분류될 만큼 불교가 박해를 받은 결과라고 말했다. 이념집단은 박해를 받을수록 내면이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한문을 우리 말로 바꾼 문투로 답사기를 기술했다는 저자는 “역사의 숨결을 일깨워줄만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찾아가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명찰순례》는 한문에 까막눈인 대부분의 사람에게 전통 문화에 대한 체적 지식을 가진 학자가 이를 조목조목 풀어쓴 훌륭한 역사 기록 구실도 한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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