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巡講話’ 주요내용
  • 남문희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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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  개방이 중국의 유일한 활로이고 개혁하지 않으면 살길이 없다. 개혁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사직해야 한다.

■ 자본주의의 몇 가지 것은 사회주의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 개혁에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고 그 핵심은 사상을 해방하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를 중시하고 경제건설을 경시하면 안된다.

등소평의 연보

생년월일 : 1904년 8월 22일

본적 :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

학력 : 1920~1924년 프랑스 유학. 1926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및 증산대학 유학

신장 : 1m50cm

취미 : 트럼프 수영 축구경기 관람, 경극 감상, 술·담배를 좋아하며 특히 흡연량은 보통 이상

건강 : 냉수욕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청력이 쇠퇴해 보청기 사용

직위 : 전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20년(16) : 프랑스 유학

1922년(18) : 주은래가 조직한 종국공산주의청년단 프랑스 지부에 가입

1924년(20) : 파리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1926년(22) : 소련 유학

1927년(23) : 당중앙위와 함께 상해로 감

1931년(27) : 홍군 제1군단 정치부 주임

1932년(28) : 모택동노선 추종하다 당에서 추방담함 (1차 실각)

1934년(30) : 장정에 참가

1935년(31) : 모택동이 권력 장악하는 계기가 된 遵義회의에 참가

1937년(33) : 우백승의 8로군 제129사단 정치위원

1940년(36) : 현재 부인인 탁림과 결혼

1941년(37) : 일본군 지역에서 무장공작대 활동

1945년(41) : 중공당 중앙위원회 선출

1948년(44) : 화해총전선 위원회 서기

1949년(45) : 중화인민군 건국 행사 참가

1950년(46) :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

1952년(48) : 서남지구에서 토지개혁 전면 실시

1953년(49) : 국무원 부총리

1954년(50) : 중앙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

1956년(52) : 당 중앙조직부장

1957년(53) :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 참가

1958년(54) : 모택동과 함께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

1959년(55) : 제2차 전인대 사천성 대표

1960년(56) : 북한 방문

1961년(57) : 주은래 총리 소련방문 때 총리업무 대행

1962년(58) :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白描黑描’론 언급

1963년(59) : 소련 공산당에 보내는 중국 공산당의 공개서한 작성에 참여

1964년(60) : 제3차 전인대 북경시 대표

1968년(64) : 문화혁명 영향으로 당에서 추방당함(2차 실각)

1971년(67) : 모택동에 탄원서 제출

1973년(69) : 임표사건 이후 주은래의 보살핌으로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

1975년(71) : 제1부총리

1976년(72) : 주은래 추도식을 계기로 벌어진 천안문사건의 책임자로 몰려 모든 직책에서 박탈당함(3차 실각). 모택동 사망. 4인방 체포

1977년(73) : 당 10기 3중전회 결의로 완전 복권

1978년(74) : 당 11기 3중전회에서 권력 완전 장악, 개혁정책 실시

1979년(75) : 미국 방안

1980년(76) : 국무원 부총리 사임

1982년(78) :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 중앙군 사위 주석

1983년(79) : 국무원 중앙군사위 주석

1985년(81) : 《등소평 문선》 출판

1987년(83) : 정치국 상무위원 사임

1989년(85) : 천안문사태 이후 중앙 군사위 주석직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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