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는 중국정부의 잠재적 동지
  • 수전페어즈 통신원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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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초 이후, 중국에서 빛이 바랬던 孔子가 오늘날 영예를 되찾고 있다. 1919년 5·4학생운동에 이어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에 자극받아 1920년대에는 ‘공자 격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60년대 중반의 문화혁명기간에는 紅渭兵들이 산동성 공자의 고향 曲阜에 있는 그의 사당과 비석을 파손하는 데까지 이르렀었다. 70년대 중반의 林複에 대한 비판운동도 실은 공자를 겨냥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비록 공격의 진짜 목표가 故 恩來 총리로 여겨지긴 했지만.

 그러나 오늘날 중국정부는 공자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이미 진행시키고 있다. 아직까지 중국정부는 공직생활과 도덕에 대한 이 철학자의 가르침에 관심을 두되 家事와 인간관계에 관한 가르침은 대체로 무시하는 선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공자에 대한 재평가작업은 江澤民 당총서기가 지난해 10월 북경에서 열린 공자탄생 2천5백4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공자의 사상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확인되었다. 그는 공자의 사상이 오늘날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면서 “넘치는 것은 버리고 알맹이를 찾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 참석자는 “공자는 중국의 문화발전에 대한 이념적 기반으로 첫째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정신, 둘째 미래에 대한 면밀한 관심, 셋째 미래에 대한 지표로서의 역사적 경험평가 등 세가지의 알맹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참석자는 '공자의 회의론적 태도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경제적 측면에서는 근면 검소 협동정신과 같은 공자적 가치가 아시아의 '네마리 작은 龍'이 번영을 이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말했다.

“넘치는 것은 버리고 알맹이만 찾자"

몇몇 다른 사람들은 공자의 가름침이 공익을 위해 노력하는 정직한 관리들의 양성에도 한몫 했음을 강조했다. 毛澤東조차도 공직생활에서의 겸손·충성·비이기적 태도를 장려했음에 비추어 훌륭한 공자의 생도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학생과 지식인들의 자세를 바로잡아나가는 과업을 추진함에 있어 공자를 잠재적인 동지로 보고 있다. 1년 전의 북경시위는 당구의 사태 장악력뿐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가치 전반에 대해 예기치 못한 도전이었다. 작년 6월 이후 중국지도부는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는 건전한 공산당 이념과 개인주의와 이윤에 치중한 서방 부르조아 불건전한 영향 사이의 대조적 측면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부르조아 사상 못지 않게 위험스럽다고 보는 동유럽사태의 발전상은 그런 것이 있었다는 정도로 알려졌을 따름이다).

 학생·소장학자·연구소의 젊은 연구원 등 이른바 ‘젊은 지식인들'은 공공봉사는 외면하고 작년 가을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한 참석자의 말처럼 ' 경력, 사랑 및 우정의 화합'등 개인적인 사항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공자家의 요리비법 공자 館店에서 공개
 ‘중국 공자재단'과 유네스코가 공동후원한 작년 10월의 이 모임에는 아시아 유럽 소련 미국측 대표가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도 대규모 대표단이 참석했다. 추측컨대 한국의 공자에 대한 접근자세는 공직생활에서 뿐 아니라 가족관계 및 사회생활에서의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점에 있어 중국인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한국의 한 참석자는 공자사상의 부활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고 중국에서도 공자사상이 원형대로 부활할 것 같지는 않다. 가족구조 및 사회적 여러 관계에 대한 공자의 숱한 가르침들이 1949년 이후 중국정부의 사회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돼온 상태여서 그의 사상이 온전하게 부활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한국에서처럼 ‘봉건적 잔재??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구질서 지지를 위해 로비활동을 펴는 보수주의적 孔子派가 중국에는 없다. 중국에서는 독자적인 압력단체를 거의 볼 수 없으며 통제력을 회복한 지도자들이 공자의 유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선택권을 쥐고 있다.

 공자가 다시 사랑을 받게 됐다는 것은 곧 그와 관련된 여러 의식들이나 사당들이 관광용이긴 하지만 본래의 상태로 회복됐음을 의미한다. 공자와 그의 많은 후손들이 묻혀 있는 곡부의 대성전, 생가와 묘지들이 이제는 방문객에게 개방되고 있는 바, 방문객들은 1937년 공자 후손들이 떠나버린 생가의 사랑방에 머무를 수도 있다.

 서울에서와 같은 근엄한 맛이 없을지 모르나 이곳 북경의 사당과 곡부의 대성전에서는 옛 악기와 무용을 곁들인  釋璪의식이 행해져왔다. 오늘날 북경의 사당에는 역사박물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전에 西安과 太原에 있던 사당들도 박물관으로 바뀌어 새롭게 단장됐다. 孔家의 요리비법도 이미 공자 館店에서 공개된 바 있다. 家楓도 77대손까지 뻗쳐 있는데 이중 한사람은 중국에, 다른 한사람은 해외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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