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과 애완견
  • 박순철 (편집국장) ()
  • 승인 199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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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기구의 ‘강력한 손’은 안 미치는 곳이 없다. 가격이 바로 되지 않고서는 세상이 바로 될 수가 없다.”

아리스티포스는 유쾌한 철학자였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그는 독설로도 유명했다. 술을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내에게 “그건 당나귀도 할수 있네”라고 면박을 준 일도 있었다. 수영을 잘한다고 뽐내던 사내도 마찬가지로 당했다. “고작 물고기가 잘하는 짓을 가지고 으스대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러나 육체를 수상쩍게 본 점에서는 아리스티포스도 평범한 철학자였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정신 세계에 별처럼 빛나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관심은 좀처럼 올림피아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대중은 달랐다. 올림피아의 우승자는 단번에 그들의 우상이 돼버렸다. 영웅이 개선하는 날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성곽의 일부를 헐어 새로 길을 냈고 그는 일평생 이 ‘私道’를 이용할 수 있었다. 조각가는 그 모습을 대리석에 담았고 시인은 찬양하는 노래를 읊었다. 이런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선수들은 어려서부터 헌신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 1천9백명에게도 훈련의 고통이나 우승의 영광이 크게 다를 리 없다. 금메달 리스트를 위해 국가가 울리고 국기가 올라가도 승리의 보상은 결국 선수 개인에게 정확하게 귀속된다. 금메달에 가격표는 달려 있지 않지만 그 주관적 또는 객관적 가치는 엄청나기 때문에 선수는 여러 해 동안 뼈를 깎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가격은 성화와 금메달, 스포츠와 인간 드라마의 밝은 불빛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몇달 전 〈한국일보〉는 중국 사람들과 그곳에 사는 우리 교포들이 시추라든가 페키니즈 같은 중국 혈통의 애완견을 사려고 우리나라에 몰려오고 있다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이런 개들이 중국의 공무원과 기업인 사이에 선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값이 우리나라보다 2배 이상 비싸, 흰색 페키니즈는 개의 모양을 한 실물 화폐나 뇌물 수표인 셈이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뇌물 수요도 늘어나면서 특혜라는 서비스의 가격은 뛰고 뇌물 화폐의 공급도 증가하지 않으면 안됐나 보다. 이렇게 되면 설사 중국에 실명제가 있더라도 별 수 없을 것이다. 하여튼 이 중국 애완견의 얘기 속에서, 지하 경제의 세계에서도 가격은 엄존하며 그 가격의 힘은 쉽게 황해를 건너와 서울 중구 필동의 애완견 상가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다.

 이처럼 릴레함메르의 은빛 슬로프로부터 북경의 우중충한 관가에 이르기까지 가격 기구의 ‘강력한 손’은 안 미치는 곳이 없다. 그러니까 가격이 바로 되지 않고서는 세상이 바로 될 수가 없다.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의 밑바탕에는 한 사회의 가치관이 깔려 있다. 가령 대학 교육에 대한 광적인 수요의 밑바탕에는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대뜸 3류 시민 취급을 하려 드는 ‘학위 광기’의 잣대가 버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설립이 엄격하게 통제돼 공급이 묶이면 대학 졸업장의 가격은 뛸 수밖에 없다. 학사 학위가 필수품이 돼버린 사회에서 그 값이 치솟으면 의식주 가격이 뛰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또 인맥의 가격은 너무 비싸고, 노력이나 실력의 값은 너무 싸게 매겨져 있다. 이른바 ‘인간 관계’에 대한 수요가 크니까, 근무 시간도 제쳐놓고 신랑 신부를 축하해 주기 위해 교통난을 무릅쓰고 달려간다. 생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밤 늦도록 상가에서 자리를 지킨다. 일부 외교관이 외교보다는 ‘?交’에 힘쓴다는 비난도 이런 상황에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다 보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일할 맛 안나는 사회’가 자연히 굳어져 버린다. 물론 국제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독과점 허물기 위해 ‘가격의 신호등’ 주시해야
 가격이 바로 서려면 우선 공급이 자유로워야 한다. 예컨대 대학 교육의 가격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대학 설립이 원칙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중국 애완견의 입 벌어지는 가격 속에는 공급 통제적인 특혜 구조가 숨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지난 30년 동안의 권위주의체제 아래에서 모든 분야에 걸쳐 독과점 구조가 굳어졌다. 이를 풀 수 있는 열쇠는 관료제도가 움켜쥐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수요 쪽에 있다. 철학은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대비하는 관조의 거리를 갖는다. 경제학이라고 해서 그 ‘거리’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어진 가치관을 전제로 주관적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치관 자체의 변화 역시 중요하다. 자원 · 국제관계 · 한반도 정세가 모두 극적으로 변화하는 전환기적 상황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金泳三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돌이 다가오고 있다. 문민 정부는 민주화와 부패 청산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신한국’의 이상은 어디론지 실종된 느낌이다. 신한국은 신한국인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한국 건립이 의미 있는 명제가 되려면 그것은 결국 도덕적 명제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확인하고 현재의 좌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모든 事象에 대해 매겨놓은 가격의 신호등을 끊임없이 주시해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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