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장년 기획원 “거듭나야 산다”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1.08.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상 ·복지 ·환경쪽으로 눈돌려 …국제화시대 대응이 과제

“이제는 경쟁과 자율이라는 시장원리에 의해 경제가 운영되어야 할 때다. 정부가 모든 것을 지휘하고 경제기획원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 단기적 정책 마련이라는 차원을 넘어 제도적 개혁 등 장기적 과제를 추진하는 것으로 역할이 승화되어야 한다. 이는 눈앞에 다가오는 21세기에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는 길이며 기획원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22일 崔珏圭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기획원 30돌 기념식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장년의 기획원은 그동안 한국경제 발전의 구심체로 그 역할을 다해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자리매김’을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경제기획원 30년은 우리 경제의 발전상과 맥을 같이했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깃발 아래 국내 경제정책을 총괄해 오늘의 우리 경제를 쌓아올리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대다수 국민들이 경제정책하면 기획원을 떠올린다. 그러나 장년을 맞은 오늘의 기획원을 대견하게 여기는 분위기만은 아니라는 데 기획원 사람들의 고뇌가 있다. 독선적이라는 비판에다 심지어 이제는 경제기획원이 “필요없다”는 해체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이 다른 한쪽의 현실이다. 스스로 위상을 재정립해야 할 전환기에 기획원은 지금 서있는 것이다.

61년 5 ·16을 성공으로 이끈 朴正熙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경제개발을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개발행정체계의 도입을 구상했다. 당시 조정기능밖에 없었던 부흥부에 건설부의 종합계획국, 물동계획국, 내무부의 통계국, 재무부의 예산국을 붙여 경제기획원이라는 이름의 부처를 만들어냈다. 설립 당시부터 기획기능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예산기능 등 자금동원 기능을 보태어 ‘슈퍼부처’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 차관도입 권한도 부여해 개발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완성했다.

개발계획 강력 추진의 제도적 장치
이런 완벽한 힘을 바탕으로 기획원은 60년대 수출드라이브 등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을 수립, 밀어붙였다. 불균형성장에 따른 후유증이 커지자 기획원은 79년 4 ·17 경제안정화 조처를 발표했고, 80년대에는 이른바 안정화 대책이 전면에 등장했다. 성장우선에서 안정 속의 성장으로의 일대 방향전환이요, 개발연대의 청산이었다.

기획원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학자마다 갈린다. 성장효과보다 부작용에 비중을 두는학자들은 기획원의 정책방향이 전적으로 잘못됐다는 주장을 편다. 투기를 막지 못해 불로소득이 창궐하는 세상을 열어 놓았으며, 재벌 특혜정책을 펴 그 여파가 여태껏 우리 경제의 환부가 되고 있다고 기획원을 성토한다. 또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는 대표적 과오였고, 개발인플레는 상당기간 우리 경제를 병들게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1인당 GNP(국민총생산) 6천달러 시대라는 오늘날의 성과를 중시하는 학자들은 긍정적 평가를 내린다. 이들은 “절대 빈곤을 타파하기 위한 성장 우선 전략으로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면서 결과적을 나타난 부작용만 갖고 기획원의 공과를 따져서는 안된다는 견해이다.

기획원의 관장업무는 무척 방대하다. 연간계획 ·하반기계획 등 단기계획과 5개년 계획 등 중장기계획을 입안한다. ‘재벌의 헌병대’로 일컬어지는 공정거래위원회는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는 것이 임무이다. 정책의 집행에 대한 심사평가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예산편성권은 여타 부처의 목을 죌 수 있는 기획원의 무기이다. 한푼이라도 돈이 드는 일을 하려면 기획원을 거쳐야 한다. 그밖에 각종 시책의 조정 역할이 부여돼 있다.

기획원의 업무를 들여다보면 타 경제부처와의 마찰이 숙명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획원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가족의 맏며느리”라고 말한다. 전체 집안살림을 생각해 작은 집들의 이런 저런 요구를 가려서 처리하다 보면 미움을 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2군데 이상의 부처가 관계되는 정책수립은 빠짐없이 기획원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 경기대책 부동산대책 노사분규대책 물가대책 통상대책 산업구조조정 투자우선순위조정 등의 정책입안은 어느 다른 부처와 부딪히게 돼 있다. 조정자로서 어렵게 관계부처를 설득하고도 또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권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 이런 일들은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등 일련의 경제개혁 조처 입안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정권 바뀔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
기획원은 모든 경제정책에 관계한다. 그만큼 권한은 강력할 것으로 여겨질 법하나 이에 대해 기획원 관계자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실질적 권한은 부여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전임 부총리는 “양파껍질을 벗겨보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부총리의 권한도 이와 비슷하다”고 털어놓는다. 이는 정부조직 구조와 관련이 있다. 정부조직법상 “경제기획원 장관은 경제의 기획 ·운영에 관하여 국무총리의 명을 받아 각 관계부처를 총괄 조정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는 가령 재무 상공 건설 등 경제부처가 대통령 소속인 데 반해 기획원은 국무총리 밑에 있다는 얘기다. 규정집만 갖고도 힘을 내는 라인조직에 비해 참모조직인 기획원은 대통령의 지원이 없는 한 스스로 힘을 만들기 어렵다.

기획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정권이 바뀔 대마다 타 경제부처로부터 제기됐다. 너무 조직이 비대해 칼질이 불가피하다는 여론도 비등했다. 결국 89년 행정개혁위원회에서 기획원의 조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일부 집행기능만을 해당부처로 이관하는 등 ‘소폭자르기’로 끝났지만 기획원의 자존심은 많이 상했다.

사실 기획원 사람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다. 기획원은 ‘명예롭고’, 재무부는 ‘힘이있고’, 상공부는 ‘다채로운’ 성격을 갖고 있다는 羅雄培 전 부총리의 지적처럼 “보람있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기획원 사람들은 최근 몇년새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다. 한 사무관은 “갈수록 일을 하기는 어려운데 사기의 고무는커녕 공격 일변도”라고 얼굴을 붉힌다. 행정고시 재경직 합격자 중 상위자들이 경제기획원보다 재무부 등 다른 부처를 선호한다는 것도 달라진 세태를 보여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趙淳 부총리가 물러나고 李承潤 부총리가 들어왔던 지난해 3월 두사람은 각각 이임사와 취임사를 통해 “경제기획원의 영광 되찾기”를 강조했다. 속뜻에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기왹원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만은 똑같았다.

기획원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을 표시하는 이들이 많다. “안하는 일도 없고 하는 일도 없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 기획원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는 시각에서이다. 오히려 각 부처의 다양한 의견조정과 이해집단과의 업무 협의를 실기하지 않고 제때에 매듭지으려면 기획원과 같은 성격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업무추진 방식은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문이다. 상공부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권위주의 체제에서 통용되던 ‘밀어붙이기’식 방식은 이제 통하지도 않을 뿐더러 부처간 불협화음만 조장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획원의 한 관계자도 이에 대해 공감을 표시한다. 그는 “변신을 위한 진통을 상당히 겪고 있다”면서 기획원은 달라지고 있는중이라고 밝혔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처럼 성장과 능률만을 앞세워 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기획원이 넘어야 할 산은 높고 험하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소외되고 낙후된 사회의 여러 부문, 그리고 각 계층의 욕구분출을 적절히 조정해나가면서 경제정책을 꾸리는 것은 기획원의 대표적 과제다.

李起浩 경제기획국장은 기획원의 새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90년대의 세계조류는 80년대와 달리 급변하고 잇다. 90년대는 국제화 자율화 정보화의 시대이다. 기획원은 한국경제가 이 거센 흐름에 조응할 수 있는 중장기 계획을 세워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는 7차 5개년계획도 여기에 핵심이 두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런 측면에서 기획원의 생존영역은 넓다고 할 수 있다. 통상 환경 복지 등 수요가 증대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기획원만큼 발빠르게 부응할 수 있는 조직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오마에 겐이치라는 일본의 한 경제평론가는 부처간 할거주의 극복과 국가 전반의 기획을 총괄하기 위한 국가기획청의 신설을 제안한 바 있다. 그가 우리의 기획원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나라에서 다양한 문제를 한 곳에서 종합조정하는 사령탑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기획원이 잘 돼야 경제정책 바로 선다”
趙淳 전 부총리는 “기획원이 잘 돼야 경제정책 바로 선다”고 역설하면서 기획원에 대해 부단히 정책을 제시하라고 주문한다. 일상업무로 현상유지만 할 경우 기획원은 다른 부처와 차별화되지 않으며 종합조정이라는 고유업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없게 된다는 지적이다. 그는 또 공개행정을 펴 국민을 설득하고 홍보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업공문원의 최고봉인 1급(관리관)이 8명, 국장(2 ·3급)이 19명이나 되고 5급 이상 3백31명 중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가 71%나 되는 인재의 보고, 경제기획원은 앞으로 어떻게 위상을 정립해나가야 할 것인가. 우리 경제의 앞날을 위해 무엇이 바람직한 방향인가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경제기획원 姜奉均 차관보의 주문은 곱씹어보아야 할듯하다. “기획원은 어떤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여 변신을 거듭해나가야 하겠지만 존재자체를 부정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