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宇, 大憂에서 大優 된다
  • 옥포.구미.인천. 김상익 차장대우 ()
  • 승인 199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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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 혁명 3년 '위기 탈출'/매출?순익 급증…장사꾼 기질 위력

대우전자 裴洵勳 사장의 명함은 유별나다. 보통 명함은 앞면에는 한자로, 뒷면에는 영문으로 소속 회사와 이름?직함이 인쇄돼 있다. 배사장의 명함도 앞면은 똑같다. 그러나 명함을 뒤집으면 영문 이름이 없다. 그 대신 가로 9cm, 세로 5.5cm 크기 여백에 '제품은 튼튼하게 생활은 편리하게'라는 문구가 큼직하게박혀 있다. 극성스러운 영업사원처럼 배사장은 명함을 광고 전단으로 이용한다.

 10월13일 경상북고 구미에 있는 대우전자 공장에서 만났을 때도 배사장은 여느 사장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주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전시장 바닥에 앉은 채 인터뷰를 하자고 제의했을 때 그는 선뜻 이에 응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은 배사장을 보고 수행하는 직원들은 줄곧 난감해하는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쭈그리고 앉은 채 한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했다. 배사장은 광고 모델로 등장해 어눌한 말솜씨로 '탱크주의'를 역설한다.

 광고 모델이 된 대우그룹의 사장은 배사장말고도 더 있다. 대우자동차 金泰球 사장은 "요즘, 대우차 타보셨습니까?" 하고 열심히 묻는다. 그룹 계열사에 소속돼 있지는 않지만, 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 崔正浩 사장도 24시간 애프터 서비스를 선전한다.

 이들 세 사장은 광고에 출연한 뒤 꽤나 얼굴이 팔렸다. 광고 효과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매출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러나 사장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선택이었다. 배사장은 "광고 회사의 요청이 있었을 때 주의 사람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김사장 역시 독특한 외모로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으나 정작 집에서는 아이들한테 창피하다는 불평을 듣는다고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광고 출연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대우그룹 총수인 金宇中 회장 자신이 먼저 "필요하다면 내가 광고에 출연하겠다"라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경영이 악화되고 김회장이 한때 정치에 관여해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져 침체에 빠진 대우그룹의 활력을 앞장서 되살려야 한다는 사명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룹내 주력 기업의 경영을 책임진 이들로서는 체면을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경위야 어찌 됐든 재벌그룹 사장들이 대대적으로 자기 회사와 제품을 광고하는 일에 적극 나서는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현상은 우선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란 그 밑에 흐르는 변화의 흐름이 거세졌음을 지나칠 수 없다. 간판급 사장들이 광고에 등장하는것은 변화하는 대우그룹의 한 단면을 읽게 한다.

92년 순익 2천9백82억…1년새 10배 늘어
 대우그룹의 가장 큰 변화는 경영 상태가 눈에 띌 만큼 좋아졌다는 점이다. 70년대 무서운 기세로 성자하던 대우그룹이 80년대 후반에 얻은 것은 '꼴찌'라는 불명예였다. 대우그룹은 78년 대우조선을 인수해 그룹의 몸집을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대우조선은 10년간 극심한 적자에 시달리면서 다른 계열사의 발목을잡는 천덕꾸러기노릇을 해왔다.

 그룹내 주력 기업 중 하나인 대우자동차도 승용차 업계에서 꼴찌로밀려났고, 대우전자는 '가전 2.5사'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대우전자가 '가전 3사'라고 우기지만 3사의 대열에 끼워주지 못하겠다"는 것이 업계의 이야기였다. 소비자들은 품질과 애프터 서비스가 나쁘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서울역 맞은편에는 진한 갈색의 웅장한 건물이 있다. 대우센터라 부르는 이 건물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대우 임직원의 자존심이다. 한때 이 건물을 팔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우그룹 경영 상태는 나빴고, 직원들의 자존심은 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그러나 '꼴찌'소리를 묵묵히 참고 들어야 했던 대우 임직원들은 올들어 부쩍 기가 살았다. 대우그룹이 무서운 속도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최근 5년 간의 경영 성적표는 대우의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우선 그룹 전체의 매출액은 89년 11조3천억원에서 92년 19조9천8백억원으로 두배가까이 늘어났다. 외형 증가보다 더 주목할 것은 순이익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점이다. 91년까지만 해도 고작 해야 2백84억원에 머물던 순이익 규모는 92년 불과 1년 사이에 2천9백82억원으로 무려 10배 이상 커졌다. 대우그룹은 93년 매출을 작년보다 30% 이상 늘어난 26조원, 순익은 5천1백억원으로 한껏 늘려 잡았다(60쪽 도표 참조). 설비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도 92년 1조2천4백억원에서 93년에는 57%가 늘어난 1조9천5백억원으로 대폭 늘렸다.

 이같은 실적 때문에 9월18일부터 이틀간 용인연수원에서 열린 임원 세미나는 말 그대로 잔치 분위기였다 김우중 회장은 "3년 전과 비교해 볼 때 대우조선 대우전자 대우자동차가 그룹의 핵심 기업으로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사실만으로도 '관리 혁명'의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다"라고 임직원을 격려했다. 김회장은 또 "우리의 개혁 작업은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보다 적어도 3년 이상 앞선 것이었고, 어느 면에서는 우리가 이 변화에 불을 당긴 역할까지 했다"며 자부심을 표현했다. 관리 혁명에서 자신감을 얻은 대우그룹은 현재'세계 경영, 기술 대우'를 기치로 내걸고 있다(63~64쪽 기사 참조).

김회장 '안살림' 주력…'관리 혁명' 성공
 대우가 내세우는 '관리 혁명'의 진원지는 옥포의 대우조선소이다. 89년 대우조선은 최악의 노사 분규에 시달렸다. 1년 2백일 가까이 해외 출장을 떠나는 김회장은 89~90년 1년 6개월 동안 옥포에서 발이 묶였다. 그 대신 김회장은 자전거를 타고 1백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조선소 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근로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아침이면 불쑥 근로자가 사는 집에 찾아가 아침밥을얻어 먹었다(밥값은 '금일봉'으로 지불했다).

 해외로만 나돌던김우중 회장은 조선소를 돌아보며 안살림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때 해안에 쌓여 있는 기자재를 경비하는 직원이 무려 1백80명에 이르고, 통근 버스 노선이 비합리적으로 책정돼 운전기사가 50명에 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도 목격했다는 것이다. 뒷날 해안 경비는 셰퍼드에 맡기고 버스 노선은 재조정했다.

 '생산 현장의 비효율이 조선소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판단한 김회장은 긴급 사장단 회의를 옥포에서 열고 본격적인 '관리 혁명'에 들어갔다. 대우조선 尹元錫 사장은 "한때 3만명이 넘던 근로자가 현재 1만1천명으로 줄었는데도 매출이 커지고 생산성은 60% 이상 늘었다"고 관리 혁명의 성과를 말했다.

 관리 혁명 이후 대우그룹의 종업원 수는 89년 9만3천명에서 92년 7만8천명으로 1만5천명이 줄어든 반면 간은 기간 1인당 매출액은 2배 이상 늘었다(61쪽 도표 참조). 근로자 자신이 "데모하면 대우, 대우하면 데모"라고 과거를 말할 정도로 극심했던 노사 분규는 그동안 대우그룹을 허덕이게 하는 한 요인이 됐지만, 역설적이게도 되살아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해준 셈이다.

천덕꾸러기 대우조선 '효자'로 변신
 사실 요즘 들어 대우그룹 전체가 활기를 찾는 것도 최근 대우조선의 경영이 급속도로 좋아진 데 크게 힘입었다. 작년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한 대우조선은 올해 26억달러어치 선박을 수주했다. 해양 플랜트 수출도 2억5천만달러에 이르렀다. 대우조선은 올해 들어 9월 말까지 세계 신주 발주량의 거의 4분의 1을 독식했다. 과거의 천덕꾸러기가 92년말 현재 2천1백억원이 넘는 당기순이익(국민차 포함)을 기록한 효자로 대접받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2000년까지는 조선경기도 좋아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윤원석 사장은 "척당 1억달러에 달하는 30만t급 대형 유조선 중 수명(20년)이 다한 것이 많아 6~7년간 물량은 계속 늘어날 뿐 아니라 대우조선이 선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있다"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는 "조선이 어려울 때 투자해준 주주(계열사)에 큰 이익을 돌려줄 것이다"라고 '빚갚음'을 장담했다.

 과거 노사 분규의 대명사였던 대우그룹은 92년과 93년 2년 연속 무분규를 기록했다. 대우그룹은 노사 분규로 인한 피해 손실액을 88년 1천1백31억원(분규 발생 12건)으로 계산한다. 분규 발생이 5건으로 줄어든 89년의 피해액도 9백42억원에 이르렀다. 당연한 일이지만 무분규를 기록한 92~93년에는 단 한푼의 손실도 없다. 80년대 말과 비교하면 최근 2년간 1천억원 안팎의 돈을 앉아서 벌었다는 '셈'도 성립한다(62쪽 도표 참조).

 노사 분규의 격전장이자 관리 혁명의 진원지였던 대우조선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 1시간 동안 '반생산 회의'가 열린다. 반생산 회의는 근로자들이 자발적으로 1주일 간의 작업량을 정하고, 지난주의 작업 성과를 점검하는 회의로서, 관리 혁명 이후 새롭게 들여온 제도다.

 《시사저널》 취재진은 10월 셋째주 반생산 회의가 열린 현장에 들이닥쳤다. 산기생산부 서부기 반장은 회의를 시작하면서 "아무개씨, 어제 장모가 오셨다던데 식사 대접은 잘했나?" "감기가 걸렸다더니 몸은 어떤가"하고 반원들의 가족과 건강부터 자상하게 챙겼다.  안부를 물은 뒤 서반장은 1주일간 각자가 할일을 배당하고 지난주의 업무 성과를 점검했다.

 10월 둘째주 이 반의 생산성은 평균 1백24%였다. 평균에 미달한 반원은 좀더 분발하라고 지적받았다. 서반장은 1주일동안 반원들이 소모품을 얼마나 썼는지 묻고 지나치다 싶은 반원에게는 다음부터 아껴 쓰라고 꾸짖기도 했다. 회의가 끝난 뒤 한 반원에게 '주어진 일만 해도 그만인데 왜 일을 더하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반장이 형님처럼 잘해주기 때문에 보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라고 답변했다.

 대우조선에서 불붙은 '관리 혁명'은 모든 계열사로 확산되고 있다. 대우조선 사장으로 있다가 91년 12월 대우자동차로 자리를 옮긴 김태구 사장은 취임 직후 '품질 좋은 차, 성능 좋은 차, 가격 좋은 차'를 만든다는 기치 아래 의식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현장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적자인 대우자동차 "흑자 자신"
 김사장은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9월부터 3개월간 1만3천명에 이르는 모든 임직원을 2백명 단위로 직접 교육하고 있다. 90일 동안 60회 이상 강연해야 하기 때문에 일요일에도 쉬지못할 정도로 일정이 빡빡하다. 대우자동차는 아직도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김사장은뜻밖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작년에 교육비에만 3백억원을 투자했다. 같은 적자가 나더라도 위축되어 있을 때의 적자와 분위기가 되살아날 때의 적자는 개념이 다르다." 그는 대우자동차가 내년부터 흑자를 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대우자동차의 판매를 맡은 최정호 사장도 금년초 회사가 출범하자마자 경영 혁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우자동차판매(주)는 합작 관계를 맺어온 대우와 미국 제너럴 모터스(GM)가 92년 10월말 결별한 이후 판매를 강화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최사장은 판매망을 확충하기 위해 애프터 서비스를 앞세워 소비자 속으로 깊이 파고들고 있다.

 대우자동차는 금년 1~9월 국내 시장에서 20만4천대를 판매했는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 이상 늘어난 것이다. 최사장은 "24시간 철야 서비스와 부품값 인하는 그 자체가 이익을 가져다 주지 않지만 이를 통해 고객의 신뢰를 회복해 판매 증대를 꾀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17만대를 판매한 작년에 보증 정비에 들어간 돈(2백70억원)과 31만대 판매가 예상되는 올해 정비에 들어가는돈이 같은 수준이라면 그만큼 품질이 높아진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한편 대우전자의배순훈 사장은 '탱크주의'를 부르짖으며 실지 회복을 노린다. 공기방울 세탁기로 기세를 올린 대우전자는 92년과 93년 상반기만을 비교했을 때 총매출액이 8천억원에서 9억5백억원으로 19% 이상 늘어났다.

 배순훈 사장은 탱크주의가 단지 탱크처럼 튼튼한 제품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탱크주의는 기본에 충실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세탁기라면 빨래가 잘 되어야 하고, 텔레비전은 그림이 잘 보이고 소리가 잘 들려야 한다"라는 것이 배사장의 탱크주의이다.

 일본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낸 제품을 흉내 내는 것은 신제품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그는, 실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불필요한 '첨단기능'을 과감히 빼버리고 기본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만들어 대중 제품에서 승부를 걸겠다고 말했다.

 대우그룹 사장들은 유난히 자기 목소리가 강하다. 회장 자신이 해외에서 영업 활동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 경영권이 실질적으로 전문 경영인에게 대폭이양됐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 과정과 관련해 대우조선 윤사장은, 해마다 경영 실적을 보고하는 것말고는 회장에게 결재받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장들도 '자율 경영'을 강조한다.

 대우그룹 전문 경영인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50대 초반인 젊은 사장들이다. 대우전자 배순훈 사장, 대우자동차 김태구 사장, 대우조선 윤원석 사장, 대우중공업 石鎭哲 사장, (주)대우 무역 부문 柳基範 사장, 대우자동차판매(주) 최정호 사장 등 핵심 기업에 포진한 사장 6명은 모두 40~43년생으로 5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다. 이들은 광고 출연도 마다지 않을 만큼 '장사꾼 기질'이 강하다.

 대우그룹의 인맥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뉘어 있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김우중 회장과 같이 출발한 창업 세대다. 이들은 대부분 은퇴했거나 경영 일선에서 한발짝 물러났다. 두 번째 인맥은 흡수 인맥이다. 대우그룹은 지난 25년간 새로 기업을 세우기보다는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형태로 팽창을 거듭해 왔다. 이 때문에 대우그룹은 '정경 유착'의 대명사로 지목되기도 했다. 세 번째로 각 전문 분야에서 발탁한 영입파를 꼽을 수 있다. 네번째 인맥은 공채 출신으로, 이들은 현재 전무까지 승진했다. 대우그룹은 다른 그룹에 비해 연조가 짧기 때문에 이처럼 인맥이 복잡하다.

주력 기업 정상화로 '정체성' 확립중
 현재 50대 초반인 핵심 사장들은 모두 영입파로 분류된다. 배사장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국과학기술 교수로 있다가 76년 대우중공업 연구실장으로 발탁됐다. 김태구 사장은 산업은행에서 근무하다 73년 대우실업 이사로 입사했다. 그밖에 50대 간판 사장들도 영입파에 속한다. 인맥이 복잡한 만큼 다소 화합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받지만, 최정호 사장은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다 보니 갈등이 드러날 틈조차 없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어찌 됐든 2~3년 사이 대우그룹은 50대 사장을 중심으로 급격한 세대 교체를 이루었다. 세대 교체의 주역인 젊은 사장들은 '타고난 장사꾼'인 김우중 회장의 세례를 받은 듯 '장사꾼'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인다. 김태구 사장은, 장사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말했다. 최사장은, 대우는 세일즈맨 정신이 특히 강하다고 자부한다.

 건설로 성장한 현대그룹에 '노가다' 기질이 진하게 배어 있고, 일본식 경영을 본받은 삼성그룹에 깔끔한 경영 스타일이 있다면, 대우그룹의 경우 오퍼상으로 출발한 기업답게장사꾼 기질이 바탕에 깔려 있다. 재벌 문제를 집중새서 연구하는 한국경제연구원 ??? 박사는 "부실 기업 인수를 통해 성장한 대우그룹은 그동안 경영 정상화를 이루느라 자신의 강점인 '장사꾼 기질'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으나 최근 주력 기업이 성장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대우그룹은 경영과 기업 문화 양면에서 고유의 줄기를 잡아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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