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음모, 막연한 휴머니즘
  • 이형석 (<헤럴드 경제> 기자) ()
  • 승인 2006.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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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나>, <화씨 9/11>보다 설득력 있어
 
혹시 ‘척 노리스 게임’이라는 것을 아는지? 얼마 전까지 미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던 일종의 말장난 놀이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척 노리스가 도마 위에 오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사실 부시 대통령은 달변가다. 다만 그가 자꾸 발음을 틀리는 이유는 어디선가 척 노리스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사실 중립국이 아니다. 척 노리스가 어느 편인지 살피고 있을 뿐이다’, ‘척 노리스는 화성에 다녀왔다.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등등.

척 노리스는 <델타포스> <텍사스 레인저> 등 1970~1980년대 B급 액션물의 주인공이었던 인기 스타다. 극중에서 그는 늘 테러 집단을 응징하는 강력한 남성의 상징이자 정의의 수호신, 애국주의의 화신이었다. 실제로 척 노리스는 때마다 거액의 후원금과 지지 연설을 아끼지 않는 열혈 공화당원이기도 하다. 척 노리스를 조롱하는 이 게임은 부시 행정부가 잇달아 내놓은 호전적인 외교 정책과 애국주의에 대해 젊은 세대가 느끼는 정치적 염증을 반영한다.

9·11 테러가 발생한 지 5년여가 흘렀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는 지난 3월20일로 꼭 3년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다시 한번 반전여론이 고양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도 아메리카니즘을 반성하는 ‘포스트 9·11’ 경향이 우세한데, 차례로 국내 관객과 만나는 <시리아나>(3월30일 개봉)와 <크래쉬>(4월 6일 개봉)도 ‘포스트 9·11’ 영화에 속한다.

<시리아나>, <화씨 9/11>보다 설득력 있어

중동에서 석유는 공동의 먹잇감이다. <시리아나>가 이 ‘중동 정글’에서 마치 포식자와 같은 미국의 행동 패턴을 ‘음모론’에 의해 탐구·분석한 텍스트라면, <크래쉬>는 바이러스처럼 번식한 미국의 인종적 ‘오만과 편견’을 관찰한 휴머니즘적인 보고서다.

‘시리아나’(Syriana)는 워싱턴의 두뇌 집단(Think tank)들이 사용하는 은어로 중동 지역을 국경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이권에 따라 자의적으로 분할해 지칭하는 말이다. 이 영화는 중동에서 활동했던 전직 CIA 요원 로버트 베이어의 <악마는 없다(See No Evil)>라는 책을 원작으로 했다. 중동의 석유 채굴권을 두고 미국 정부와 석유회사, 중동 왕실 내 정치세력들이 벌이는 음모와 배신,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사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영화에는 먹이사슬에서 고리가 되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주요 캐릭터로는 퇴역을 앞둔 중동의 암살 전문 베테랑 CIA 요원 밥 반즈(조지 클루니), 에너지 분석가로 산유국 왕자에게 경제 고문으로 고용되는 바이런 우드맨(맷 데이먼), 석유회사 대합병을 돕는 야심찬 흑인 변호사 베넷 홀리데이(제프리 라이트), 미국에서 중국으로 채굴권이 넘어가 졸지에 해고된 파키스탄 이민자 살림 아메드 칸과 그의 아들 와심 등을 꼽을 수 있다.

CIA는 중동 산유국 왕실 내 무능한 왕자와 결탁해 친미 정권을 유지하고 그 대가로 개혁을 부르짖는 또 다른 왕자를 살해한다. 합병을 통해 석유 채굴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두 기업은 CIA에 협조하고, 이 음모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베테랑 CIA 요원은 ‘단물만 다 빨린 채’ 제거당한다. 자본으로부터 차갑게 버림받은 아랍 청년은 자신을 따뜻한 품으로 맞아준 이슬람에 귀의해 자살 테러를 감행한다.

 
결국 중동의 지도를 그리는 것은 미국이며, 미국의 석유자본이라는 점을 이 영화는 일체의 장식과 수사를 배제한 채 냉정하고 지적인 목소리로 전달한다. <시리아나>가 가진 분석적 성찰과 세부 묘사의 힘이, 타고난 선동가인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보다 이 영화를 더 설득력있게 만든다.

반면 미국 사회 내부로 시선을 돌린 <크래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상업적인 영화다. 영화는 흑인 남성-히스패닉 여성 커플이 탄 차와 사고가 난 한국계 ‘아줌마’의 악다구니로부터 시작한다. <크래쉬>는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랍인, 아시아계로 이어지는 인종 차별의 연쇄 고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 결과 그들 모두는 뼛속까지 피부색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물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게으르다고 타박받던 멕시코계 중년 가정부와 젊은 백인 ‘사모님’이 포옹하고, 성추행하던 말단 백인 경찰관이 모욕당한 중산층 흑인 여성을 불 속에서 구해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영화는 인종을 가로질러 계급 문제를 제기하고, 일방이 아닌 상호적인 차별을 빼어나게 그려낸다. 요컨대 소외된 현실이 한 사회에 희생양을 필요로 하게 만들고, 이 ‘희생양 사회’가 인종적 적대와 분노를 재생산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에 이 휴머니즘 영화는 기대고 있다. 하지만 막연한 휴머니즘이 인종적·성적·계급적 착취로 지탱되는 견고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영화가 가져다준 감동이 성급하다고 느낀 것은 그 때문이다.

두 편 모두 미국에 대한 얘기다. 하지만 대한민국 관객들에게도 이 두 영화가 주는 의미는 남다를 듯하다. 3D 업종에 동남아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이라크에 파병한 한국 현실을 떠올리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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