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걸작은 그녀 자신이다”
  • 표정훈(출판 평론가) ()
  • 승인 2006.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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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루 살로메, 자유로운 여자 이야기>/대담한 가설로 19세기 말 시대적 한계 극복한 여류 작가의 삶 조명

 
‘내 눈빛을 지우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십시오. 나는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나의 양팔이 꺾이어 당신을 붙들 수 없다면, 나의 불붙은 심장으로 당신을 붙잡을 것입니다. 나의 심장이 멈춘다면 나의 뇌수라도 그대를 향해 노래할 것입니다. 나의 뇌수마저 불태운다면 나는 당신을 내 핏속에 싣고 갈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루 살로메(1861~1937)에게 건넨 사랑의 노래다. 그들의 첫 만남은 릴케의 나이 22세, 루 살로메의 나이 36세 때 이루어졌으니, 릴케에게 루 살로메는 누이이자 어머니이자 친구이자 연인이었고, 무엇보다도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루 살로메와 헤어진 뒤 릴케는 걸작들을 쏟아냈다.

루 살로메의 나이 21세 때 만난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반 시간만 보내도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내가 지난 12개월 동안 위대한 작품을 완성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루 살로메와 니체의 첫 만남은 사뭇 극적이기까지 하다. 결핵에 걸려 요양 중이던 루 살로메가 로마 성베드로 성당 부속 건물의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니체가 다가와 이렇게 유행가 가사 같은 인사를 건넸던 것. ‘우리가 여기에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186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스위스 취리히에서 철학, 종교학, 신학, 예술사 등을 공부한 작가였던 루 살로메는 ‘남자들은 여자들과 우정을 나눌 수 없나요?’라고 질문하며 자신에게 매혹되어 허우적대는 남성들을 조롱하기도 하고, 중년 이후에는 젊은 남성들을 스스로 택하여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으니, 요즘 말로 하면 쿨해도 한참 쿨한 여성이었다. 이를 두고 저자 프랑수아즈 지루는 루 살로메가 ‘사랑하는 남자의 의식 세계에 직접 파고드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다’라고 평한다. 그리고 남자를 선택하고 열렬히 혹은 점잖게 사랑하다가 남자를 버리곤 했던 루 살로메의 냉정함에 대해 저자는 ‘자유롭다는 것은 때로 비정하기까지 하다’라고 표현한다.  

“루 살로메의 삶은 자유를 향한 영혼의 고투”

 
그러나 저자는 루 살로메가 단지 (유명한) 남성들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점 때문에 부각되는 것을 경계한다. 루 살로메의 삶은 ‘자유를 향한 영혼의 고투’였다는 것이다. 루 살로메는 남성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을 즐겼지만, 그들에게 결코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존경받는 작가였을 뿐 아니라, 창작 활동을 통해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다. 바로 이 점에서 루 살로메는 19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한 자유로운 여성이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더없이 충실하고 솔직한 루 살로메의 태도에 매료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재능은 매번 나보다 뛰어나고 오히려 내 생각을 완성시켜 주었소.’

그런 루 살로메도 결혼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동양학자 안드레아스와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성생활 없는 ‘섹스리스 결혼’이었다. 40년 세월을 남남처럼 지낸 기묘한 부부 관계였으니,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는 관계도 아니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다섯 오빠를 둔 여섯째로 태어난 루 살로메가 오빠들의 과도한 사랑 속에 자라면서 일종의 근친상간에 가까운(?) 오누이 관계에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운다. 어린 시절의 이런 가정 환경 혹은 경험이 그녀를 비정상적인 금욕주의로 몰아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프랑스 최초의 여성 감독이자 장관

결국 루 살로메는 신경정신과 의사 프리드리히 피넬레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지만, 남편 안드레아스의 이혼 동의서를 받아내지 못하자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고, 이로 인해 유산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포함한 두 차례의 유산이 루 살로메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운다.

루 살로메의 삶에 관해 사뭇 대담한 가설들을 내놓은 저자는 프랑스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최초의 여성 신문 편집장, 최초의 여성 장관이었다. 그러니 루 살로메의 삶을 돌이켜보고 평가하는 데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다분히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이 책에서 저자는 루 살로메가 ‘자아를 찾아가는 예술가로서 완전한 선구자였다. 그녀의 걸작은 그녀 자신이다’라고 평가했으니 한 여성에 대한, 아니 한 인간에 대한 찬사로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싶다.

한편 이 책과 겹쳐 읽으면 좋은 책으로 <인간으로 살고 싶다: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한길사), 그리고 김동리·박완서·나혜석·오정희·황순원 등 여러 작가들이 여성을 제재로 쓴 작품을 모은 <여성, 남성의 거울>(문학과 지성사)을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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