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같았던 ‘천재’와의 만남
  • 성우제(소설가, 전 <시사저널> 기자) ()
  • 승인 2006.02.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 백남준 선생을 회고하며 / 청중과 소통하려 공연 중에 욕설도

 
백남준 선생은 처음 만나자마자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1995년 나는 <시사저널>에서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던 그해 9월, 비엔날레 특별전을 조직했던 백 선생을 특별하게 인터뷰하고 싶었다. 나는 당대 최고의 문화부 기자 출신인 김 훈을 떠올렸다. 지금은 소설가로 명성을 떨치는 김 훈 씨는 당시 <시사저널> 편집국장이었다.

편집국을 총지휘하는 국장이 하루를 통째로 헐어 광주까지 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취재차 미리 내려왔고, 김 국장은 약속 시간에 맞춰 당일 새벽 버스를 탔다.

우리는 광주시립미술관 앞에서 만났다. 오후 3시께, 저 멀리서 백 선생이 둔중한 몸으로 뒤뚱뒤뚱 걸어왔다. 특유의 멜빵 차림이었다. 나는 반갑게 달려갔다.
“선생님, 저희 국장이 오셨습니다. 어디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요?”
“뭐라고? 난 약속한 적 없는데?”
“아니, 약속 하셨잖아요. 국장께서 서울에서 오셨는데….”
“몰라. 나 바빠. 지금 가야 돼.”
그리고는 또 뒤뚱뒤뚱 가버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너,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라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은 뻔했다. 변명을 만들어낼 틈도 없었다.
“백 선생이 약속 잡은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못하겠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김 훈 국장은 단 한 마디만 했다.
“괜찮아. 천재는 그럴 수 있어.”
그리고는 바로 <시사저널> 취재 차량을 향해 소리쳤다.
“오 기사, 나 터미널까지만 태워줘요.”
나는 그때부터 ‘인간 김 훈’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쓰러진 뒤에도 “그래도 생각할 자유 남아 있다”

그날 저녁 미술관 옆 공연장에서 백선생은 피아노 퍼포먼스를 벌였다. 한 손에 든 비디오 카메라로 피아노의 내부와 자기의 눈, 코, 입 따위를 찍어 대형 화면으로 보여주는 기괴한 퍼포먼스였다.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공연한다는 사실 때문에 지루하지만 간신히 참는다는 표정이었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했던지 몇몇 사람이 플래쉬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순간, 낮에 내가 받지 않았던 불호령이, 백선생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어떤 씨팔놈이 사진 찍어? 어떤 놈이야? 나와.”
객석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단 한 마디로 청중을 사로잡은 완벽한 퍼포먼스였다.

 
그때부터 청중들은 퍼포먼스를 즐길 수 있었다. 나 또한 긴장을 해서 그런지 조금도 지루한 줄 몰랐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화가 풀리지 않아 백 선생의 일정을 짰던 갤러리현대 큐레이터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백 선생이 출국하기 전에 약속을 반드시 잡으라고 ‘명령’하다시피 했다.

연락이 왔다. 약속 시간도 해프닝처럼 참 해괴했다. 밤 11시. 세검정 올림피아호텔 커피숍. 김 훈 국장은 그 시간까지 무던히 기다려주었다.

나는 녹음기와 필기구를 가지고 인터뷰 자리에 배석했다. 김 국장이 물었다.
“선생님께 미디엄과 메시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겁니까?”
백 선생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귀찮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미디엄이 메시지고, 메시지가 미더엄이지.”
나는 당황하고 긴장했다. 저런 대답이 나오면 주눅이 들어 다음 질문을 하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김 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로 돌파해나갔다.
“이번 전시회는 통신과 예술이 결합됨으로써 빚어지는 새로운 자유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창조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새로운 자유의 영역 안에서 메시지는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 것입니까?”
순간 백 선생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의자를 당겨 자세를 바로 한 뒤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 이 사람, 뭘 좀 아네?”
인터뷰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불꽃이 튀는 열정적인 인터뷰였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달라진 백 선생은 20대 청년처럼 격정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젊었을 때 나는 좌익이었다’ 같은 색다른 고급 정보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당시 백 선생은 남들에게 보이는 삶 자체를 해프닝성 퍼포먼스로 사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그를 백악관에 초대했을 때, 바지가 훌러덩 내려가게 한 것도 실수가 아니었다. 상황을 정밀하게 계산한 백 선생의 고난도 퍼포먼스였다.

청년끼리는 통하는 것일까? 평생 도전적인 삶은 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이끌고 방북했을 때 백선생은 무릎을 쳤다고 한다. “저건 20세기 최고의 퍼포먼스야.”
어느 광고에 출연해 “내일이 있는 한 나는 영원한 청년”이라고 일갈했던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000년 2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새 밀레니엄 특별전으로 <백남준 회고전>을 기획했을 때, 휠체어에 앉은 청년으로서 그는 멋지게 재기했다. 그때 그는 구겐하임 미술관 천장까지 화려한 빛을 쏘아 올리는 새로운 장르 ‘레이저 아트’를 처음 선보였다.

당시 서양 기자들 틈에 끼여 취재하던 나는 거의 감격의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가 웅얼웅얼 하면서 한국말로 내지르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 나이 벌써 예순 여덟이야. 그래도 생각할 자유는 남아 있어.”
그는 이렇게 끝까지 도전하는 청년으로 살다 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